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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버핏연구소 - 북리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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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독자의 재산 증식에 기여하는 투자 및 경제뉴스와 정보를 생산합니다.]]></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Thu, 21 May 2026 11:22:5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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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버핏연구소 - 북리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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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아마존, 세상의 모든 것을 팝니다</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53957</link>
			<description><![CDATA['아마존, 세상의 모든 것을 팝니다'. 브래드 스톤 지음. 21세기북스. 2014. 3. 24 초판 발행.&nbsp;제프 베조스(Jeff Bazos)의 숨겨진 이야기&nbsp;제프 베조스(Jeffrey Preston Bezos). 출생 1964년 1월 12일. 출생지: Albuquerque. Princeton University(전기공학·컴퓨터과학). Amazon 창업자. 이사회 의장. Blue Origin 창업자. The Washington Post 소유주(2013년 인수)&nbsp;◆&nbsp;베조스의 '너털웃음' 뒤에는 '섬뜩함'이 있다-베조스의 너털웃음은 그의 시그니처이다. 그는 목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우하하" 소리를 크게 내며 호탕하게 웃는다. 그처럼 치열하게 목표에 집중하면서 살아온 인물의 이처럼 요란한 너털웃음은 부조화의 극치이다. 임직원들은 베조스가 대화를 끊으며 상대를 물러나게 하는 이 너털웃음을 들으면 심장이 찔리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동료들은 이 너털웃음을 의도적이라고 본다.&nbsp;너털웃음을 무기로 상대를 압도하고 무장해제시킨다는 것이다.&nbsp;-베조스는 빨간펜을 들고 고객 입장에서 쉽고 긍정적인 부분만 이야기하고 어렵고 흑역사 같은 부분은 모조리 지워버린다. 사람들은 아마존의 진짜 이야기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빨간 펜 밑에서 살아남은 글귀로 이뤄진 전설을 듣고 있을 뿐이다.&nbsp;-베조스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신경쓰지 않으며 문제 자체를 즐긴다.-베조스를 상사로 모시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대중은 '베조스'하면 그 유명한 너털웃음이나 유쾌한 파안대소를 떠올리겠지만 실제로 그는 공포를 유발할 정도로 '폭발'한다. 이 점에서 그는 스티브 잡스를 닮았다. 스티브 잡스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직원들을 벌벌 떨게 했다.-베조스는 스티브 잡스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그는 협력사에게 무한 경쟁을 요구했다.&nbsp;-아마존 임직원 회의에서는 파워포인트가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직원들은 자신들이 발표할 내용을 6페이지 짜리 산문 형식으로 발표해야 한다. 베조스는 이 방식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있다고 믿는다.&nbsp;-베조스는 창업 당시 차고에서 자신이 얼기설기 만든 책상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여섯 개 밝은 갈색 문짝으로 붙인 커다란 테이블이다. 이 책상은 아마존의 검소함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인용되고 있다.&nbsp;-"우리는 고객 중심적입니다. 우리는 이 사업을 진정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보고 있으며, 창조를 즐깁니다. 경쟁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경쟁자에 집중합니다."-"기업 운명을 바꾸는 아이디어는 점진적으로, 부단한 시행착오를 거쳐 이뤄집니다. 머릿속 전구에 반짝 들어오는 기적같은 순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관점의 차이는 IQ 80점 차이와 동일하다."(제프 베조스).&nbsp;-"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미래를 만드는 것이 더 쉽습니다. 미래를 만드는 것이 쉽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창업 9년 동안 적자-매출이 급증했지만 비용은 더 급증했고 아마존은 파산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손실액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1994년 아마존은 손손실 5만2,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아마존 창업 초기를 지켜본 사람들 대다수는 아마존의 원가 구조가 현실성이 없으므로 조만간 파산할 것으로 에상했다. 아마존은 2003년 흑자 전환했지만 실제로는 아찔할 정도로 성장하던 2012년에도 아마존은 사실상 적자였다.-그렇지만 제프 베조스는 자신의 강점인 '입심'을 활용해 영리하게 문제를 풀어나갔다.&nbsp;-베조스는 투자 설명회를 개최했다. 베조스는 2000년이 되면 이익을 낼 것이라고 설명했다(실제로는 아마존은 2000년에 순손실 14억 달러를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회사가 망할 가능성이 70%라는 점도 언급했다. 베조스는 현실을 왜곡시키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회사를 홍보한다. 힘든 현실을 희망으로 바꾸는 그의 화술에는 놀라운 설득력이 있었다.그 순간에는 몰랐겠지만 투자가들에게는 억만장자가 될 기회를 잡는 순간이었다.&nbsp;-"저는 베조스의 말에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베조스는 자신이 하는 일이 신의 작품이며 돈은 거기에서 따라오는 부산물리는 말에 너무 설득력있게 들렸습니다."(초기 투자자 에릭 딜런. 주식 브로커)-그렇지만 투자하지 않은 참석자들이 훨씬 많았다. 메코 이동통신 임원을 지낸 톰 앨버그는 투자 하지 않았다. 앨버그는 "나는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것이 즐거웠는데 이를 없애는 사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성공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봤습니다. (그때 투자하지 않은 것을) 지금은 후회하지만요..."&nbsp;-어떤 참석자는 "혹시라도 사업이 성공한다면 의회도서관 크기의 창고가 필요할겁니다"라고 친절한(?) 조언을 해주었다.-베조스는&nbsp;'고객 만족', '무료 배송'이라는 용어에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했다. 이익은 뒷전이었다. 그는 장기적 관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제프 베조스의 성공 비결을 알려면 데이비스 쇼를 알아야 한다. 데이비드 쇼는 1980년 스탠퍼드대에서 컴퓨터 공학으로 박사를 받았다.&nbsp;그는 1986년 모건스탠리에 입사해 차익거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팀에 합류했다. 그는 여기서 차익거래의 원리를 파악하고 독립해 1988년 투자가 도널드 세스만으로부터 2,800만달러를 투자받아 맨해튼에 자신의 이름을 넣은 'D.E 쇼'(데스코)라는 회사를 차렸다.&nbsp;-그는 일반적인 월스트리트 회사와 달랐다. MBA 소지자 대신 수학자를 고용했다. 그리고 수학에 기반한 트레이딩을 했고, 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nbsp;-제프 베조스가 입사할 당시의 D. E. 쇼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앞서 베조스는 1986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고 주식 트레이더가 되기로 마음먹었다.&nbsp;-베조스는 기록의 대가였다. 베조스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 노트를 상시 휴대했다. 그는 부사장으로 승진했다.&nbsp;-인터넷이 등장하자 베조스는 이것이 상업적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Everyting store'라는 제목의 사업 계획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아마존이다. 그는 'Everyting store'에서 판매할 수 있는 아이템을 연구하다가 결국 책(book)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책은 어떤 형태가 똑같아서 소비자는 자신이 구매하려는 상품이 뭔지를 확실하게 안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출가된 책이 300만종이어서 반스앤노블, 보더스 같은 대형서점도 모두 보관하지 못하고 있었다.&nbsp;-베조스는 쇼에게 사표를 냈다. 쇼는 베조스를 만류하며 "당신이 사표를 내면 두둑한 월급봉투와 안락한 월스트리트 보금자리를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nbsp;-1994년 7월 베조스는 집 차고를 개조해 사무실을 차렸다. 베조스는 홈 데포에서 무개한 60달러 짜리 밝은 갈색 문짝으로 책상을 만들었다. 그는 지금도 이 책상을 사용하고 있다.&nbsp;-첫 몇달 동안은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베조스와 임직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몇주가 지나자 주문이 쏟아지면서 흥분의 정도는 줄어들었다. 초기 판매 방식은 원시적이었다. 아마존에는 책이 없었다. 고객이 주문을 하면 아마존이 도서 유통업체에 주문을 하고, 며칠 뒤 책이 도착하면 지하실에 보관했다가 고객에게 배송했다. 대체로 1주일 이상이 걸렸다. 희귀본은 1개월이상이 소요됐다.&nbsp;-문제가 발생했다. 아마존이 도매상에 책 주문을 하려면 10권 이상을 주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존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우리는 해결책을 발견했습니다. 책 10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책 10권을 주문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책 1권과 무슨 지의류(地衣類)에 관한 책 9권을 주문했습니다.&nbsp;지의류 책은 언제나 제고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도매상은 '죄송합니다.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지의류 책은 품절 상태입니다'라는 쪽지와 함께 필요한 책 1권이 배송돼 왔습니다."(베조스).&nbsp;-베조스는 회사 여직원 매킨지 터틀(MacKenzie Tuttle)과 결혼했다. 매킨지는 1992년 프린스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베조스의 사무 보조 직원으로 입사했다. 두 사람은 사귄지 3개월만에 약혼했고 그로부터 3개월 후 결혼했다. 결혼식은 1993년 웨스트팜 비치의 리조트 브레이커스에서 열렸다.◆ "아마존과 맞서려고 하지 마라. 차라리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라"-베조스는 "아마존이 경쟁하는 분야는 거대하므로 다 함께 이길 수 있다"고 즐겨 말한다. 그렇지만 아마존은 그간 숱한 경쟁자들을 파산시켰다. 서킷 시티, 보더스, 베스트 바이, 반스앤노블 등 아마존이 파산시킨(파산보호신청 포함) 기업 이름을 나열하자먼 열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nbsp;1. Toys "R" Us : 장난감 전문 유통 강자였지만 온라인 전환이 늦었고, 초기에 아마존에 온라인 판매를 맡겼다가 주도권을 잃었습니다. 이후 막대한 차입 부담까지 겹쳐 2017년 파산보호 신청.2. Borders Group : 오프라인 서점 체인이었지만 전자책 시대와 온라인 판매 경쟁에서 Amazon에 밀리며 2011년 파산.3. Circuit City : 가전 유통 대기업이었지만 가격 경쟁력과 온라인 대응에서 뒤처지며 2008년 파산.4. Sports Authority : 스포츠용품 오프라인 대형 체인. 온라인 가격 경쟁 심화와 부채 부담으로 2016년 파산.5. Linens 'n Things : 생활용품 체인으로 Bed Bath & Beyond와 경쟁했으나 전자상거래 확산 속에 2008년 파산.6. Sears Holdings : 한때 미국 유통 제왕이었지만 온라인 전환 실패로 2018 year 파산보호 신청. “아마존 시대의 희생자”로 자주 거론된다.&nbsp;7. J.C. Penney : 백화점 모델 약화와 온라인 경쟁 속에 2020년 파산보호 신청.8. Neiman Marcus : 럭셔리 백화점이지만 전자상거래 전환 비용과 부채 부담 속에 2020년 파산보호 신청.◆ 최고의 인재여야 한다&nbsp;-베조스는 최고의 똑똑한 인재를 채용하는 것이 아마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봤다. 그는 지금도 주요 임원 면접을 직접 보고 있다. 그는 "미국 뉴욕에 사는 쥐(rat)가 몇마리인가"하는 식의 기상천외한 질문을 던진다.&nbsp;제프 베조스가 전하는 최고의 20가지 조언&nbsp;1.&nbsp;“앞으로 10년 동안에 어떤 변화를 예측하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재미있는 질문이지만, 식상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안 물어본다.&nbsp;“앞으로 10년 동안 바뀌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두 질문 중에서, 두 번째 질문이 더 중요한 질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 예측 가능한 정보를 가지고, 비즈니스 전략을 수립하기가 더 쉬우니까. 소비자들은 더 낮은 가격과 더 빠른 배송, 더 많은 선택을 원한다. 앞으로 10년 동안 이 전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런 상상을 하기는 힘들 것 이다. “이봐 베조스, 나 아마존이 참 좋은데, 값을 좀 비싸게 냈으면 좋겠어.” “나 아마존이 참 좋은데, 배송이 너무 빠르게 와”&nbsp;우리는 이 불변하는 전제에 힘 쓰고있기 때문에 10년이 지나도 헛고생은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불변하는 것을 알면, 그런 곳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것이 좋다.2. 모든 비즈니스는 항상 젊어야 한다. 만약 당신의 소비자층이 늙어간다면, 당신의 회사는 Woolworth’s처럼 될 것이다. (Woolworth’s: 20세기에 유명한 백화점, 지금은 망했음)3. 당신의 회사가 답을 알고 있는 비즈니스만 한다면, 당신 회사는 오래가지 못한다.4.&nbsp;아마존에서는 지난 18year 동안 3가지 아이디어만 가지고 일했다.&nbsp;이것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끈 이유 3가지이다. 1) 소비자를 항상 먼저 생각해라. 2)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라. 3) 인내심을 가져라.5. 두가지 종류의 회사가 있다. 소비자에게 물건 값을 최고로 많이 받으려는 회사와 물건 값을 최소로 받으려는 회사. 우리는 후자가 되려고 한다. 당신 회사의 이익률은 우리 회사에는 기회이다.&nbsp;6. 고집이 없다면 포기를 너무 빨리할 것이다. 또 융통성이 없다면 삽질을 할 것이고, 해결할 문제에 색다른 방법의 해결책을 못 볼 것이다.&nbsp;7. 모든 비즈니스 계획은 처음 실제상황에서 바뀌게 된다. 실제상황은 계획하고는 항상 다르게 진행된다.8. 구세대 비즈니스는 30%의 시간을 서비스를 만드는 데 쓰고, 70%의 시간을 그 서비스를 알리는 데 쓴다. 신세대는 70%를 서비스 만드는 데 쓰고, 30%를 알리는 데 써야 한다.9. 가격을 올려야 할 상황에서도 아마존은 신념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격은 소비자와의 약속이며 가격을 합리적으로 유지하여야 소비자의 믿음을 얻을 수 있고 장기적으로 볼때 그 믿음이 이윤을 극대화 할 수 있다.10. 1994년에 아마존을 시작하는 결정은 생각보다 쉽게 했다. 이때 나는 “후회 최소화”라는 생각 방식을 사용했다. 80살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고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어떻게 하면 후회를 최소로 줄일까 생각하면 된다. 내가 80살이 되었을 때 아마존을 만들려고 시도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이 엄청난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인터넷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고, 실패한다고 해도 한번 해 보는 것이 후회하지 않는다. 하나 확실했던 것은 아마존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11. 아마존이 혁신하는 방법은 소비자 중심으로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게 아마존이 혁신하는 방법의 기준이다.&nbsp;12. 보통 회사들은 매일 어떻게 경쟁회사보다 앞지를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우리 회사는 어떻게 소비자에게 도움될 수 있는 혁신을 만드는가를 고민한다.13. 회사는 쿨한 것에 대해 집착하면 안 된다. 쿨한 것은 오래가지 않으니까.14. 부재가 혁신을 부른다.&nbsp;무엇인가가(인력, 시간, 자금 등이) 부재한 어려운 상황은 결국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게 하기 때문이다.15. 일 년에 하는 실험 횟수를 2배로 늘리면 창의력이 2배가 된다.16. 비판받기 싫으면 새로운 것을 안 하면 된다.17. 장기적이 목표를 세운다면 소비자와 소유주의 이익이 상반되지 않는다.18. 창조는 오랫동안 오해를 받을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진심으로 믿는 일을 해도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때로는 비판을 할 것이다. 이때 사람들의 비판이 맞는다면 그들의 말을 수용해야 되고, 반대로 그들이 맞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오랜 시간 동안 오해를 받을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게 창조의 핵심이다.19. 다른 회사들이 무엇을 하는지 시장조사를 해야 한다.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저거 베껴야 되겠다” 하지 말고, “저거 괜찮은데. 저거를 보고 영감을 받아서, 무엇을 만들어 볼까?” 라고 생각해서 당신만의 유일한 색깔을 만들어라.]]></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Thu, 23 Apr 2026 08:57:4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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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고객을 발명한 사람 헨리 포드</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53491</link>
			<description><![CDATA[고객을 발명한 사람 헨리 포드. My life and work. 헨리 포드 지음. 공병호 옮김. 2006.&nbsp;원작 &#39;My Life and Work&#39;은 1923년 출간&nbsp;&#39;자동차 왕&#39; 헨리 포드(1863~1947)◆ &#39;현대&#39;를 발명한 기업인&nbsp;인류 역사의 위인들 가운데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가장 소외돼 있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헨리 포드(1863~1947)이다. 헨리 포드는 인류 역사상의 위인들을 그가 남긴 업적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첫번째 자리에 모셔야 마땅하다.&nbsp;가장 큰 이유는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창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직장에서 일하면서 고정적인 급여를 받는 고용 사회를 「현대」라고 한다면 헨리 포드는 그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nbsp;헨리 포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nbsp;노년에 이른 포드는 우연히 존 다링거라는 소년과 함께 미국의 교육 제도에 대해 토론을 하게 됐다. 이 소년은 포드가 미국의 교육 제도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반론을 제기했다.&nbsp;『할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현대란 말예요』&nbsp;그 말을 들은 포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nbsp;『얘야, 그 「현대」를 발명한 게 나란다』헨리 포드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회사에 출퇴근하는 대가로 고정적인 급여를 받는 세상을 대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은 깊고도 방대하다.&nbsp;그런데 지금의 역사 교과서는 헨리 포드를 단 몇마디의 문장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끝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 교과서만으로는 포드가 얼마나 인류 역사에 어마어마한 일을 했는지를 짐작하지 못한다. 지금의 교육 제도는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지 못한다.&nbsp;-헨리 포드는 미국 사회 구성원들을 풍요롭게 만들었다.&nbsp;1880년경 미국의 백만장자 숫자는 100명 가량이었는데, 1916년이 되자 4만명으로 급증했다.&nbsp;-헨리 포드의 산업화는 미국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크게는 성공 방정식이 바뀐 것이다. 이전까지 경영자는 저주받은 직업인이었다. 그런데 경영자가 멋진 직업인으로 칭송받게 됐다. 경영대학원(비즈니스 스쿨, MBA 스쿨)도 이 무렵 생겨났다.&nbsp;- 경영자의 역할이 증대됐다. 이전까지는 &#39;경영(management)&#39;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다. 그런데 포드 자동차가 성공하면서 산업 전략을 이끌고, 동맹을 이루거나 깨고, 진격 지점을 선택하고, 전체 사업의 세부 계획을 감시 감독할 수 있는 능숙한 기술, 즉 경영 능력이 중요했다. 이에 따라 최고 경영자의 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nbsp;- 포디즘은 미국 사회에 풍요를 가져왔다. 당대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말한 &#39;금칠갑 시대&#39;(Gilded Age)에 그 장면이 나온다. 어느 졸부는 연회에서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웠는데, 이는 순전히 부의 냄새를 빨아들이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어느 졸부는 산책을 나갈때 1만 5,000달러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힌 개목걸이를 씌운 강아지를 데리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 어떤 아기는 1만달러짜리 요람에 누워있었고, 네명의 의사가 둘러선 채 아기의 건강 상태를 정기적으로 보고하기도 했다. 어느 졸부는 성(Castle)을 짓고 뉴욕에서 사들인 미술품들로 성의 방 곳곳을 채웠다. 이들중 일부는 돈없는 유럽 왕실 자제를 자기 사위로 모아들이기도 했다.&nbsp;-헨리 포드의 가장 큰 업적은 자동차를 일반 대중이 살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당시 자동차는 부유층만 소유하는 고가 제품이었지만, 포드는 오로지 한가지 모델(모델 T)을 대량 생산했다.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분업화, 시간 연구, 동작 연구를 도입했다. 그래서 자동차 가격을 대폭 낮춰 농부와 노동자도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게 했다. 이는 다동차가 &ldquo;사치품 &rarr; 생활 필수품&rdquo;으로 바뀐 결정적 계기가 됐다.&nbsp;-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포드는 이동식 조립라인(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결과 자동차 생산 시간을 12시간 &rarr; 1시간 30분으로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자동차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가격은 급격히 하락했다.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전 세계 제조업의 표준이 됐다.-그는 노동자 임금을 대폭 올렸다. 일당 5달러 정책이 그것이다. 1914년 포드는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정책을 발표했다. 하루을 임금 5달러(기존 대비 두 배)로 지급하고 8시간 근무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헨리 포드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근로자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의 이면에는 자사 노동자가 포드자동차를 사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즉 &ldquo;생산자 = 소비자&rdquo; 구조를 만든 것이다.&nbsp;◆ 헨리 포드의 명언(Qoutes)&nbsp;"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당신이 옳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Whether you think you can, or you think you can&#39;t &mdash; you&#39;re right, because you&#39;ll become what you think)"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돈을 잃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인생을 잃는 것이다.""고객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고객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면 고객은 "더 빠른 말(horse)"이라고 답했을 것이다.""생각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복잡함은 비용을 증가시키고 단순함은 이익을 만든다."&nbsp;"성공의 비결은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는 능력이다.""비전 없는 행동은 시간 낭비이고 행동 없는 비전은 꿈일 뿐이다.""장애물은 목표에서 눈을 돌릴 때 보인다.""인간이 자신의 내면의 능력과 강점을 체계적으로 탐구한 것은 정말이지 얼마되지 않는다."◆ "대중의 생각에 매몰되지 말라"-헨리포드는 1863년 미국 미시간주 디어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독학으로 시계를 연구해 고장난 시계를 거뜬하게 수리했다. 이는 그가 &#39;자동차 왕&#39;이 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39;말없는 마차&#39;(자동차)를 만드는 것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nbsp;- 헨리포드는 1876년에 어머니를 잃었다. 이 경험 이후 그는 내성적인 성격에서 더더욱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고장난 시계, 농기구 등이었다.&nbsp;-그렇지만 그는 직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16세에 디트로이트로 갔다. 여기서 공장 기계 견습공으로 취업했다. 여기서 그는 가스엔진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헨리는 자기 자신의 가스엔진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향에서 아버지가 물려준 5만평의 땅에서 산림을 벌채해 목재를 판 돈으로 엔진 만들기에 열중했다.&nbsp;-취직과 더불어 훗날 자신을 자동차왕으로 이끌고 도와줄 클라라 브라이언트와 결혼했다.&nbsp;-당시 미국 창업가들에게 자동차는 신사업으로 관심을 끌었다. 독일에서 벤츠와 다임러가 가소린 자동차를 발명하자 이 여파가 유럽 전체로 삽시간에 퍼져나가 여러 곳에서 시험용 자동차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이 영향은 미국까지 건너와 일리노이주에 사는 듀리 형제가 미국 최초로 가소린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등 바야흐로 내연기관 자동차 개발열기가 기운차게 일어났다.&nbsp;-이러한 움직임 속에서도 헨리는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다.&nbsp;-1891년 에디슨전기회사에 취직했다. 헨리가 이 회사에 들어간 이유 중의 하나는 이제까지 해온 자동차 연구중에서 가장 취약했던 자신의 전기지식을 보완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nbsp;-회사일이 끝나는 대로 집으로 달려와 밤을 잊고 엔진연구에 몰두했다. 그로부터 2년 만인 189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드디어 2기통짜리 엔진을 부엌 싱크대 위에서 완성했다.&nbsp;헨리는 이 엔진으로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셋방 뒤켠에 아예 공작실을 차려놓고 퇴근 후에는 침식을 잊은 채 자동차 만들기에 몰두했다.&nbsp;-천신만고 끝에 1896년 5월 초여름 새벽, 최초의 2기통짜리 포드자동차(일명 &#39;쿼드리사이클&#39;)를 완성됐다. 헨리는 차를 시험운전하기 위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밖으로 끌어내려 했으나 공작실의 문이 좁았다. 그는 도끼로 문과 벽의 일부를 부쉈다. 도끼 소리에 잠에서 깬 가족들이 뛰쳐 나왔다.&nbsp;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첫 시운전을 했다.&nbsp;조수가 자전거를 타고 안내하는 새벽길을 따라 거뜬히 거리를 한바퀴 돌아오는 시운전은 성공이었다. 이 차가 바로 유모차를 닮은 포드1호인 쿼드 리사이클(Quadricycle)이다. 이것이 포드 자동차의 시작이었다.&nbsp;1899년 첫 회사 설립했지만 실패했다. 이어 1901년 두 번째 회사를 설립했지만 또 실패했다.&nbsp;-1903년 그는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임직원 10명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것의 해결이 아니었다.&nbsp;-우선 경쟁자가 많았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을 때 당시 미국에는 이미 88개의 자동차 회사가 있었다. 디트로이트에서만 15개 자동차 회사가 경쟁했다. 그는 이들과 경쟁해야 했다.&nbsp;-결정적으로 자동차 수요가 없었다. 비쌌고 고장이 잦았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유용하고 익숙한 교통수단은 단연 우마차였다.&nbsp;"자동차는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수요랄 것도 없었다. &#39;말없는 마차&#39;는 별난 취미 정도로 취급받았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자동차가 절대 장난감 이상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돈 있는 사람들도 자동차가 상업적인 가능성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아주 낙관적인 사람은 자동차가 잘하면 자전거와 맞먹는 수준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자동차는 사치이며 트럭 정도라면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들은 자동차가 경제의 중요한 부문이 될 것이라는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헨리 포드)-"대중의 생각에 매몰되면 사업의 기회는 사라진다. 그들은 어제는 과거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며 지난해의 사고를 그대로 갖고 오늘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들이다. 삶에 정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는 다음번 진보의 바퀴가 돌아갈 때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헨리 포드)"똑똑한 사람들이란 늘 그런 식이다. 너무나 똑똑하고 현실적이어서 항상 뭐가 안되는지에 대해 훤히꿰고 있다. 늘 한계 밖에는 모른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전문가를 절대 쓰지 않는다. 경쟁자를 꺾고 싶다면 그에게 전문가를 보내주면 된다. 그러면 경쟁자는 전문가의 충고를 듣느라 일은 거의 하지 못할 것이다."(헨리 포드)-그는 생산 방식을 혁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서 언급한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시간연구, 동작연구, 분업화가 그것이었다. 이 결과 1908년 &#39;Model T&#39;를 내놓았고 이는 대성공했다. 헨리 포드는 자본주의 역사상 부호 7위로 기록된다. 1위는 존 D. 록펠러이다.&nbsp;&nbsp;◆ "창업가는 세상을 바꾸려는 혁신가여야"- 기업가는 지도자로서 동종 업계의 어느 회사보다도 더 많은 임금을 주겠다는 야심을 품어야 한다.&nbsp;- 기업주가 직원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다그쳤는데 직원들이 최선을 다해봤자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연히 &#39;슬슬 시간이나 떼우자&#39;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열심이 일한 결실을 자신의 월급 봉투에서 보게 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때는 자신도 사업의 일부이며, 사업의 성공이 자신에게 달려 있고, 자신들의 성공은 사업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개닫게 된다.&nbsp;- 노동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문제라면 생계비나 수익을 얼마나 받아야할까는 간단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개인이 아니다. 그는 국가의 부에 기여하는 한 사람의 시민이자 가장이다. 양육해야 할 아이들이 있는 아버지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nbsp;-노동자에게 급여를 충분하지 않게 지급한다면 그의 어린 아이들과 어머니들까지 일하러 나가야만 하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nbsp;-창업가는 근본적으로 혁신가일 수 밖에 없다.&nbsp;1920년께 미국의 모든 산업이 침체 상태에 빠졌다. 문을 여는 자동차 공장보다 문을 닫는 곳이 더 많아졌다. 문을 닫은 공장 중 상당수는 은행가들의 손에 완전히 넘어갔다. 제조기업치고 재정 상태가 나쁘다는 소문에 시달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나의 포드 자동차 회사도 자금난에 처했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nbsp;-현실을 인정하라. 길거리에서 손을 벌리는 이웃에게 가진 돈을 전부 털어 주는 것이 나누는 삶이 아니다. 구조조정을 해서 직원을 자르고, 그래서 기업이 이익을 내서 돈을 벌면 그 돈을 소외된 이웃에 기부하는 것이 나누는 삶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성공 법칙이다.&nbsp;]]></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Tue, 31 Mar 2026 18:57:4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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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부의 제국 록펠러 : 그 신화와 경멸의 두 얼굴'</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53228</link>
			<description><![CDATA[&#39;부의 제국 록펠러 : 그 신화와 경멸의 두 얼굴&#39;론 처노 지음. 안진환, 박아람 옮김. 21세기 북스. 2010. 3. 4. 초판 발행.&nbsp;-P.S. 존 D. 록펠러(1839~1937)는 자본주의 역사상 최고 부호이다.&nbsp;자본주의가 시작된&nbsp;18세기 이후 록펠러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부호는 존재하지 않는다.&nbsp;그가 1937년 사망 당시 보유한 재산은 약 14억 달러이며 이는 당시 미국 GDP의 약 1.5~2.2%(4,000억~5,000억 달러)였다. 현재 세계 최고 부호로 꼽히는 일론 머스크는 미국 GDP의 약 1.3%(약 3,000억 달러)이다. 그러므로 록펠러는 자본주의 역사상 최고 부호이다.&nbsp;◆ 미국 석유시장 90% 장악하다&nbsp;-존 D. 록펠러가 경영한 스탠다드오일(Standard Oil)의 19세기 후반 미국 정유 시장 점유율은 약 90%였다. 현대식 독점 기업 모델의 원형이다.-스탠다드 오일이 시작된 1840년대 미국은 경제활동이 활발했다. 곳곳에서 은행이 문을 열었고, 운하가 개설됐다. 철도와 전신의 발달로 최초로 전국 규모의 시장이 창출됐다. 이에 따라 석유 수요가 급증했다.&nbsp;- 1890년대 스탠더드 오일은 최고의 권력을 유지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석유 시장의 84%를 장악했고, 정체 원유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사상 최고 수치의 점유율이었다. 몇 해동안 석유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예언들이 골치를 썩였고 전기 사용량이 늘었음에도 석유 산업의 전망은 전례없이 밝았다.-1907년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전체 등유의 87%를 차지하고 있었고, 수출 등유의 87%를 취급하고 있었으며, 미국내 등유의 89%를 판매하고 있었다. 회사 규모는 가장 큰 경쟁사인 퓨어 오일의 20배가 넘었다.- 휘발유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저질 부산물이었던 휘발유가 쓸모를 찾았다. 미국에 등록된 자동차 대수는 1898년 800대에서 1900년 8,000대로 10배 급증했다. 가솔린도 마찬가지였다. 자동차가 나오기 전에는 가솔린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몰랐기때문에 정유사는 야음을 틈타 가솔린을 강물에 흘려 보냈다. 그런데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하는 가솔린 자동차가 탄생했다.&nbsp;- 석유왕 록펠러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석유가 바닥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석유 산업은 산업이라기보다는 투기이자 모험이었다. 석유가 인류에게 지속적으로 보탬이 될지, 아니면 반짝 기적에 불과할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일상에서 검소하고 성실하라- 록펠러의 아버지 빌은 1855년 6월 12일 온타리오 오웨고 바로 남쪽에 위치한 뉴욕주 니컬스에서 마거릿 엘런과 결혼식을 올렸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중 결혼 생활을 했다. 빌은 록펠러의 가족을 클리블랜드에 정착시켰다. 온타리오 인근이었다. 아버지 빌은 이유없이 록펠러를 학대했다. 그래서 록펠러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다.&nbsp;- 당시 미국인들은 학교 교육을 신뢰하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당시 미국인들은 대학 학위를 고소득의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돈을 벌고 싶은 젊은이들은 이른바 실무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록펠러도 7개 도시에서 분교를 두고 체인 형태로 운영되는 E.G. 폴섬 상업전문학교에서 40달러를 내고 3개월 과정을 이수했다. 클리블랜드 분교는 그 마을 최고의 빌딩인 라우스 빌딩의 꼭대기층에 위치해 있었고, 창밖으로 퍼블릭 스퀘어가 내려다보였다. 이 학교에서는 복식 부기와 문서 작성법(Writing skill), 은행업, 환거래, 상법을 가르쳤다. 록펠러는 이 교육 과정에 몰입했다.&nbsp;-1855년 만 16세에 상업전문학교를 이수한 록펠러는 일자리를 찾는데 전력질주했다. 그해 여름 록펠러는 일주일에 6일씩 매일 오후 늦게까지 6주동안 필사적으로 일자리를 찾아 다녔다. 뜨겁고 단단한 길바닥을 걷느라 발이 몹시 아팠지만 결연한 의지로 강행군했다. 클리블랜드는 인구 3만명의 도시였다.&nbsp;- 1855년 9월 26일 록펠러는 머위가에 위치한 위탁판매 및 선적회사 휴잇앤터틀을 찾았다. 부사장인 헨리 B. 터틀이 록펠러를 면접했는데, 때마침 터틀은 회계 장부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부사장은 록펠러에게 점심 시간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록펠러는 흥분을 억누르며 계단을 내려왔다.&nbsp;-록펠러는 점심 시간이 끝날 땍까지 기다렸다가 사무실로 돌아가서 사장인 아이작 I. 휴잇에게 면접을 봤다. 클리블랜드 철광회사의 창립자로서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한 휴잇은 록펠러의 눈에 대단한 자본가로 보였다. 휴닛은 록펠러가 글씨를 잘 쓰는지를 꼼꼼히 확인한 뒤 말했다.&nbsp;"자네에게 기회를 주지."&nbsp;급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바로 록펠러에서 코트를 걸어놓고 일을 하라고 지시했다. 훗날 노인이 돼서도 록펠러는 그날을 극적인 순간으로 기억한다.&nbsp;"내 모든 미래가 바로 그날 정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하면 온 몸이 떨려옵니다."록펠러는 석달 후에야 처음으로 밀린 봉급을 받았다. 록펠러는 9월 26일을 취직 기념일로 부르며 평생동안 자신의 생일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nbsp;록펠러는 이 직장에서 광범위한 상업의 세계를 접했다. 1855년의 마지막날 휴잇은 록펠러에게 석달치 급료로 50달러를 지급했다. 일당 52센트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 보조 장부계원의 급료를 한달에 25달러 즉 연봉 300달러로 대폭 올리겠다고 말했다.록펠러는 몹시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범죄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종교적인 가책 때문에 자신의 욕심을 두려워했다는 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부를 축적하는 것과 노골적으로 돈을 탐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록펠러는 검소하고 시간을 엄수했으며 근면했다.&nbsp;-어느 날 오하이호에서 록펠러는 평소 존경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목사님은 "돈을 버십시오. 정직하게 벌어서 현명하게 나눠 주십시오"라고 했다. 록펠러는 그 말씀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1857년 1월 터틀이 회사를 그만두자 록펠러는 선임 장부계원으로 승진해 17세에 전직 부사장이 맡았던 업무를 떠맡았다. 공동 경영인이었던 터틀의 연봉은 2,000달러였지만 록펠러의 연봉은 500달러에 불과했다.&nbsp;- 1858년 4월 1일, 존 D 록펠러는 아이작 휴잇과 결별하고 아버지에게 빌린 돈으로 리버가 32번지에 사무실을 둔 클라크 앤 록펠러사의 공동 경영인이 됐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nbsp;"경영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습니다. 벅찬 자부심을 느꼈습니다(당시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엿보인다. 이 시기의 미국 사회에 상업은 장려받고 있었다). 자본금 4,000달러 회사의 공동 경영인이 됐으니까요."-록펠러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거래를 시작해 밀가루, 햄, 돼지고기를 중개했다. 록펠러는 클리블랜드 부두에서 두각을 나타내 &#39;록펠러씨&#39;라는 존칭을 얻었다.&nbsp;- 1890년대부터 시작된 스탠더드 오일의 재산증식은 미국 역사에서 대중을 고무하면서도 동시에 경계심을 갖게 할만한 새로운 시대가 알리는 것이었다. 사업가로서의 록펠러의 명석함과 탐욕의 불균형은 한 국가의 근본적인 경제 구조, 부의 재분배, 기업과 정부의 관계 등 미국에 심각할 질문을 야기햇다. 록펠러는 대기업의 효율성을 명백하기 증명한 독점의 한 형태를 완성시켰다.◆ 회계(accounting), 부자가 되는 출발점-록펠러는 사업가로 성취하기 위해 회계(accounting) 지식이 필수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1855년 9월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그는 10센트짜리 작은 빨간색 공책을 마련해 &#39;장부A&#39;라는 제목을 달았다. 여기에 자신의 지출과 수입 내역을 상세히 기록했다. 록펠러는 장부A를 평생 귀중품 보관소에 보관했다. 그는 회계를 부의 출발점으로 인식했다.&nbsp;"가장 똑똑하다는 임직원 중에도 부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업이 돈을 벌어다주는지, 어떤 사업이 손해를 가져다주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록펠러는 돈을 통해 세속적인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도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nbsp;-1854년 가을 록펠러는 신앙고백을 한 후 스케드 집사의 인도로 침수세례를 받고 교인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었다. 주일이면 늘 교회 어디에서든 록펠러를 볼 수 있었다. 복도를 쓸고, 불을 피우고, 등불을 켜고, 보도를 창소하고, 사람들을 안내하고, 성경 공부를 하고, 찬송을 하는 등 이타적이고 완벽한 교인이라고 할만한 모든 임무를 록펠러는 수행했다. 그는 일개 사무원에 가진 돈도 별로 없었지만, 그 작고 낡은 교회와 연관된 조직 모두에 일일이 기부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 그는 정확한 사람이었다. 15센트를 기부하겠다고 하면 그는 누가 뭐래도 그 액수를 기부했다. 또, 그는 성경 공부를 규칙적으로 해서 성경의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다.-그는 평생동안 아무리 바빠도 주일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언제나 예배당의 맨 앞줄에 앉았다. 평생 십의 일조를 냈다. 세계 최고 부자가 십의 일조를 내는 것은 복잡했다. 그래서 십의 일조를 계산하는 전담 부서를 두었다.&nbsp;-성경의 내용과 그의 자본주의적 현실 비즈니스는 완벽히 일치했다.&nbsp;◆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망자-1911년 미 정부에 의해 스탠더드 오일은 해체됐다. 스탠더드오일은 엑슨모빌(Exxon Mobil Corporation), 모빌오일(Mobil Oil Corporation), 콘티넨털오일(Continental Oil Co.), 아모코(Amoco Corporation)를 비롯해 33개 회사로 분할됐다.&nbsp;-앞서 1890년 미국 최초의 독점 금지법인 셔먼법이 제정됐다. 존 셔먼 상원의원이 입법한 셔먼법은 외형상 일반적인 독점 금지법이었지만 사실상 과도한 독점으로 각종 폐해를 양산했던 스탠더드오일을 겨냥해 만든 법이었다.&nbsp;-1906년 11월 18일 미 연방 정부는 셔먼 트러스트 법안으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해산하기 위한 소송을 미주리주에서 제기헸다. 피고로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과 그 자회사 65개가 거론됐다. 존 록펠러, 윌리엄 록펠러, 헨리 플래글러, 올리버 페인, 존 아치볼드, 헨리 로저스 등 중역들도 소송에 포함됐다. 이 결과물이 바로 1911년 시행된 스탠더드 오일 해체였다.&nbsp;-이같은 결과를 맞이한 것은 록펠러가 대중 정서와 여론을 의식하지 않았고 심지어 무시했기 때문이다.&nbsp;-스탠더드 오일 해체는 아이다 타벨(Ida Minerva Tarbell, 1857~1944)이라는 여성 작가에 의해 방아쇠가 당겨졌다.&nbsp;아이다 타벨은 미국의 언론인으로 미국의 진보시대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타벨은 자신이 편집장으로 근무학 있던 시사 전문지 를 통해 &lsquo;스탠더드 오일의 역사&rsquo;라는 시리즈를 20회 내보냈다. 이 기사는 1904년 동명의 책으로도 나오게 된다.&nbsp;이 책은 미국 뉴욕타임스가&nbsp;선정한 미국 20세기 저널리즘중 가장 중요한 100개의 보도에서 5번째로 뽑혔다-아이다 타벨의 연재 기사는 스탠더드 오일에 관한 것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다. 그녀의 글은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 조직을 예리하게 분석한 로포르타주의 역작이었다. 타벨은 연대기를 정확하게 정립했고, 이 기업 연합이 어떻게 형성됏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했으며 복잡하게 뒤얽힌 석유산업의 역사를 알기 쉽게 기술했다.&nbsp;그녀의 글은 간명하고 합리적이었으나 표면을 조금만 들추어 보면 적개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타벨의 아버지와 오빠는 정유회사를 운영하면서 스탠더드 오일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nbsp;타벨의 기사와 책은 한 기자가 팩트를 바탕으로 무적인 듯한 권력에 대항해 얼마나 그 권력을 망가뜨릴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nbsp;그녀의 글은 정치적 만병 통치약이나 관념적인 처방을 내리는 대신, 독자들의 상식적 품위와 페러플레이 감각에 호소했다. 또, 스탠더드 오일의 사업 스타일에서 좀스럽고 야비한 부분을 들춰내면서 센세이셔널한 반향을 불러 일으켯다.&nbsp;-스탠더드 오일이 독점 체제를 만들기 위해 경쟁사를 피도 눈물도 없이 망가 뜨리는 과정을 들춰내는 그녀의 글솜씨는 탁월했고 이는 미국인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nbsp;-그녀는 록펠러의 &lsquo;놀라운 천재성&rsquo;과 &lsquo;성취능력&rsquo;은 인정하면서도 스탠더드 오일의 스파이 활동, 가격 전쟁, 법원 회피 등의 자료를 토대로 &ldquo;록펠러는 강요와 사기를 일삼았다&rdquo;고 결론지었다. 또 &ldquo;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인 모두의 기업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나서서 이런 기업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rdquo;고 주장했다.타벨은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뒤 자기 아버지의 옛 숙적 록펠러를 &lsquo;공정성&rsquo;이라는 잣대를 갖고 공격했다. 그녀는 록펠러의 표정이 &ldquo;간사하고 잔인하며 형용하기 어려운 혐오감을 자아낸다&rdquo;고 했고, 포레스트 힐 저택은 &ldquo;저속함과 흉측함이 상징&rdquo;이라고 비판했다.록펠러는 타벨에게 비공식적으로는 서로 통화했지만 공식적인 토론 제의는 거절했다. 그는 친구에게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ldquo;잘못된 생각을 가진 여자와는 한 마디도 말하고 싶지 않아.&rdquo;&nbsp;-록펠러와 동료들은 여론을 무시하면서 인터뷰를 거부했고, 청문회에서도 반항적으로 행동했다.&nbsp;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을 응징하려는 대중적 분위기를 심각하게 오판했고 침묵을 고수했다. 스탠더드 오일은&nbsp;"어떤 불법적인 방법도 고의로 행한 적이 없다"는 반박 성명을 냈다.록펠러와 동료들은 스탠다드 오일 독점 체제를 깨뜨리려는 정치가들의 노력을 조롱했다. 냉혹한 비즈니스의 세계를 살아온 스탠더드 오일의 임원들은 사업 경쟁자를 다루듯이 정부 관리들을 거칠게 대했다. 스탠더드 오일의 임직원들에게 타협이란 너무 낯선 것이었다. 그들은 융통성을 조금만 발휘하면 반독점 소송을 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중략)이는 사태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매클루어 매거진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만약 록펠러씨가 탁월한 사업 협잡군만큼이나 위대한 심리학자라면 자신이 대중들에게 끔찍한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록펠러는 미국 언론사들의 취재 표적이 됐다. 기자들은 록펠러가 숨어 있으리라고 추정되는 곳을 찾아 전국을 뒤졌다. 록펠러는 요새화된 포칸티코에 은신했다. 록펠러는 전화 도청이 우려돼 아내에게 전화를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록펠러와 동료들은 이야기 하나를 전국 방방곳곳에 퍼뜨릴 수 있는 인쇄매체의 힘을 간과했다.&nbsp;록펠러는 은신하는데 성공했지만 미국인들은 곳곳에서 록펠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시사만화에는 록펠러가 자기 얼굴이 표지에 실린 간행물로 가득찬 가판대로 다가가 서글픈 목소리로 "내 이야기가 실리지 않은 게 있나요?"라고 묻는 장면이 실렸다.&nbsp;또 다른 시사 만화에는 록펠러가 동전과 지폐를 삽으로 퍼서 저울의 한쪽 접시에 담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39;우호적인 말 몇마디&#39;라고 쓰인 종이가 놓여 있었다. 이 만화의 아래에는 &#39;그는 그 값으로 얼마나 퍼부을까?&#39;라고 쓰여 있었다.&nbsp;누구보다도 비밀스러웠더 록펠러는 이제 자신의 가장 내밀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nbsp;정부와 언론으로부터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록펠러는 가정에서도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에디스는 우울증을 치료할 목적으로 유럽에 요양을 다녀왔지만 건강이 여전히 나빴다. 록펠러 주니어의 건강도 허약했다. 세티는 페렴과 독감으로 맥을 추지 못했다. (P. 338~350)◆ 가장 자본주의적이면서 가장 박애주의적인... &#39;모순적 인생&#39;-1937년 5월 23일 새벽 4시 5분 록펠러는 잠든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98번째 생일을 6주 앞두고 평화롭게 갔다. 천수를 누린 셈이다. 숨을 거두기 전 그는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벽이 딱딱해지고 염증이 생기는 심근경색이었지만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록펠러의 평온한 종말은 그가 내세에 응보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적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nbsp;-5월 27일, 록펠러의 시신은 클리블랜드로 돌아가 그를 사랑했던 두 침례교도, 어머니 엘리자와 아내 세티 사이에 묻혔다. 무덤을 훼손하려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록펠러의 관은 방탄 처리를 한 무덤에 안치되고 무거운 돌로 봉쇄됐다.&nbsp;- 록펠러는 모순적인 유산을 남겼다. 깊은 신앙과 탐욕, 동정심과 교활함을 동시에 지니고 잇었던 록펠러는 이중적 성향이 있는 미국 청교도의 전형이었다. 근검과 적극성을 장려하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본능을 부추겼던 미국의 선조인 것이다. 록펠러는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성격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부모에게서 이중적인 신호를 읽으며 자랐다. 그가 조직의 탐욕과 박애주의적 깨달음, 이 두 가지의 교모한 전형으로 살아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록펠러는 국민이 선출한 정부에 대한 위협이었다. 세계 최초의 산업 트러스트를 만든 록펠러는 자유경쟁체제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폭로하면서, 정부가 훗날 경쟁과 공정한 거래를 보장하는 규칙을 세세히 명기하도록 만들었다.- 록펠러 사후 60년만에 스탠더드 오일의 자회사 4개인 엑슨, 모빌, 아모코, 셰브론은 세계 5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nbsp;- 록펠러가 타계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됐고 석유가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경제에서 석유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록펠러는 위기에 처하면 극단적으로 침착해졌다. 이 점에서 그는 타고난 리더였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할 수록 그는 더욱 침착해졌다.]]></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Mon, 16 Mar 2026 18:39: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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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꿈을 꾼다면 일론 머스크처럼'</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53202</link>
			<description><![CDATA[꿈을 꾼다면 일론 머스크처럼. 다니엘 킴 지음. 2024. 6. 18. 미래북 펴냄.&nbsp;"왜 살고 싶습니까? 무엇이 당신에게 중요합니까?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일론 머스크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일론 머스크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39;불가능과의 전쟁&#39;이다. 그는 불가능을 현실로 바꿔 놓는 재능이 있었다.&nbsp;-일론은 하루를 1달러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39;1달러 프로젝트&#39;를 했다. 그는 창업을 앞두고 혹시 실패할 경우 뒤따를 가난을 감당할 수 있을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대형 마트에서 냉동 핫도그와 오렌지를 사서 컴퓨터를 끼로 한달 동안 매일 그것들만 먹으며 생활했다. 돈이 없는 삶이 어떤지를 직접 체험해본 것이다. 한달을 지내보니 아픈 곳도 없고 그럭저럭 지낼 만 했다. 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없이 창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nbsp;-일론의 사업은 언제나 현금과의 전쟁이었다. 2013년 4월, 일론의 계좌에는 2주를 간신히 버틸 정도의 현금만 남아 있었다. SpaceX 로켓이 3번 연속 발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극적으로 해결했다. SpaceX가 네 번째 발사를 시도해 성공했고 NASA와 계약을 하면서 회생했다.-일론은 세계 최초 인터넷은행 엑스닷컴을 창업했다. 그는 고객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싶었다. 그래서 엑스닷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에게 20닫러의 현금카드를 주고, 다른 고객을 소개해주면 10달러 현금 카드를 추가로 주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바이럴 마케팅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nbsp;2002년 30세의 일론 통장에는 1억8,000만달러(약 2,000억원)가 넘는 막대한 현금이 들어 있었다.&nbsp;그는 이 돈으로 테슬라에 650만달러(약 70억원)를 투자하면서 전기차 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nbsp;자동차 산업은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산업 가운데 가장 진입장벽이 높다. 미국의 경우 1925년 크라이슬러 설립 이후 새로 탄생한 자동차 기업이 성공한 적이 없다. 이유는 첫째 자금 조달의 어려움, 둘째 부품 조달의 어려움 때문이다.&nbsp;2005년 1월 시제품이 완성됐다 100% 전기로만 움직이는 멋진 슈퍼카였고 일론은 이것이 수백억달러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일론은 곧바로 9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했다.&nbsp;테슬라는 전기차 제조 공정의 혁신을 시도했다. 아무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리튬 이온 배터리의 병렬 연결을 처음으로 해냈다.&nbsp;2010년 6월 29일 상장된 테슬라 주가는 41% 치솟으며 일론은 2억 2,000만달러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nbsp;-캘리포니아주는 미국 50개주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고 - 2,995만명. 1990년 - 가장 높은 구매력을 갖고 있다.&nbsp;-그는 직원들을 끊임없이 압박했다.&nbsp;모터 파트의 한 엔지니어가 "3개월간 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가족들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고 하자 머스크는 "우리가 파산하면 당신은 가족 얼굴을 원없이 볼 수 있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엔지니어는 일자리로 돌아가 일을 다시 시작했다.&nbsp;-일론은 충직한 비서 메리 베스 브라운(Mary Beth Brown)을 너무 쉽게 내보냈다.&nbsp;메리 브라운은 12년 동안 머스크를 보좌했다. 테슬라, 스페이스X, 개인 일정까지 관리했고 머스크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는 &#39;머스크의 오른팔&#39;로 불렸다.&nbsp;어느 날 메리는 머스크에게 말했다.&ldquo;제가 하는 일을 보면 CEO와 거의 같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급여를 올려주셨으면 합니다.&rdquo;머스크는 메리에게 &ldquo;당신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2주 정도 휴가를 가보세요. 그동안 내가 직접 당신 일을 해보겠습니다&rdquo;라고 대답했다.&nbsp;2주 후 메리가 돌아왔을 때 머스크는 &ldquo;생각보다 당신이 하던 일 대부분을 내가 직접 처리할 수 있네요&rdquo;라고 말했다. 머스크는 곧바로 메리를 해고했다.◆ 시간은 가장 소중한 자원이다-일론은 197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내성적이었고 독서광이었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책을 읽었다. 책에 한번 빠져들면 옆에서 폭풍이 몰아쳐도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nbsp;그는 남아공의 군 복무를 피하고 더 큰 기회를 찾기 위해 17세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더 큰 기회를 위해 결국 미국 실리콘밸리로 진출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극적인 인생 대부분이 펼쳐졌다.&nbsp;-일론의 7가지 성공 비결1. 시간은 가장 소중한 자원이다고대 그리스인은 시간을 Chronos아 Kairos로 구분했다.&nbsp;크로노스 : 객관적인 시간카이로스&nbsp;: 의식적으로 주관적인 시간.&nbsp;머스크는 시간을 돈보다 더 중요한 자산으로 본다. 그는 하루 일정을 5분 단위로 쪼개 관리하고 있다. 이를 위해 회의를 최소화하고 의사결정(decision making)을 곧바로 하고 있다.&ldquo;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rdquo;"인간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시간이 주어지면 그 시간을 모두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프로젝트의 80%가 20%의 마지막 시간이 이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간 손실을 줄이려면 마감을 앞당겨야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마감은 언제나 내일이다. 나에게 모레는 없다."-"숯과 다이아몬드는 탄소라는 동일한 원소로 이뤄져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입하느냐에 따라 숯이 되기도 하고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한다."2. 제로 베이스에서 생각하라(퍼스트 프린서플(First Principles) 사고를 하라)&nbsp;-기존 관습이 아니라 물리학적 기본 원리부터 다시 생각하는 방식을 말한다.&nbsp;ex)&nbsp;로켓은 원래 비싸다 &rarr; 일론은 로켓의 원재료 가격은 얼마인지를 다시 계산했다. 그는 로켓 관련 전문 서적을 탐독했다. 이 결과 그는 그는 로켓 비용을 90% 이상 절감했다.&nbsp;자동차 배터리는 비싸다 &rarr; 일론은 배터리 구성 원가를 다시 계산했다. 이 결과 그는 전기차 가격 구조를 혁신했다.&nbsp;3.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설정하라-머스크는 항상 비현실적으로 큰 목표를 먼저 세운다. ex) 화성 식민지. 전 세계 전기차 전환. 완전 자율주행.그는 큰 목표가 사람과 자본을 끌어당긴다고 믿고 있다.&nbsp;&nbsp;4. 문제 해결에 집중하라-머스크는 직함보다 엔지니어적 문제 해결 능력을 중시한다.&nbsp;특징공장 바닥에서 직접 문제 해결설계&middot;생산&middot;소프트웨어까지 깊이 관여&ldquo;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회의는 의미 없다&rdquo;5.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머스크의 기업은 초기 실패가 매우 많았다.ex) 로켓 발사 3번 연속 실패. 테슬라 파산 직전. 생산 지옥(Production Hell)&ldquo;실패가 없다면 혁신도 없다.&rdquo;6. 최고의 인재만 모아라머스크는 채용 기준이 매우 까다롭다.머스크는 채용 때마다 &ldquo;당신이 해결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인가?&rdquo;를 묻는다.&nbsp;머스크는 실력 중심, 직급보다 능력, 빠른 실행 문화를 중요시하고 있다.&nbsp;7. 세상을 바꾸는 미션을 가져라-머스크 기업의 공통점은 돈이 아니라 미션 중심이다.&nbsp;대표 미션테슬라 &rarr; 지속 가능한 에너지로 전환스페이스X &rarr; 인류의 화성 이주뉴럴링크 &rarr; 인간과 AI 결합&ldquo;사람들은 급여보다 의미 있는 미션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nbsp;]]></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Fri, 13 Mar 2026 10:09:2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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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엔비디아 젠슨 황 생각하는 기계'</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53152</link>
			<description><![CDATA['엔비디아 젠슨 황 생각하는 기계'.&nbsp;스티븐 위트 지음. 백우진 옮김. 2025. 5. 26.&nbsp;PS. 이 책은 젠슨 황의 사실상 유일한 공식 전기이다.&nbsp;◆ 검은 가죽재킷 고집하는 이유는 '시간 절약' 때문-젠슨 황이 언제나 입고 다니는 검은색 가죽 재킷은 1,200만원(한화)짜리다. 젠슨 황은 이 검은색 가죽 재킷을 약 15벌 갖고 있다. 대부분 이탈리아 브랜드 맞춤 가죽 재킷이며 행사마다 약간 다른 디자인을 착용한다. 자세히 보면 지퍼 위치, 카라 모양, 가죽 질감이 조금씩 다르다.&nbsp;검은색 가죽 재킷을 고집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들 질문에 그는 "매번 옷을 고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에게 시간은 가장 소중한 자원이다. 젠슨 황과 비슷한 이유로 같은 옷을 입는 CEO는 종종 발견된다. 마크 저커버그는 회색 티셔츠, 스티브 잡스는 검은 터틀넥이다. 이는 그들을 상징하는 ‘시그니처 패션’ 이다.&nbsp;-엔비디아에 입사하기는 대단히 어렵지만 일단 입사하면 평생 근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짤리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젠슨 황은 인연을 중시한다. 한번 만난 사람은 반드시 기억한다.&nbsp;-젠슨 황이 게임용 GPU 개발에 전력질주하던 시기에 어느 누구도 이것이 AI시대의 핵심 부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당시 삼성전자가 HBM 사업에 철수한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젠슨 황은 치밀한 분석을 거쳐 게임용 GPU가 미래의 꽃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nbsp;-30대의 젠슨 황은 업계에서 변덕스러운 인물로 여겨졌다. 그는 거창한 선언을 했지만 성과로 연결되지 않았고 자주 사업 전략을 바꾸었다. 1999년 엔비디아가 상장할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고 그의 판단력과 성숙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불같이 화를 낸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오랜 기간 동안 젠슨 황과 엔비디아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다.&nbsp;"젠슨 황은 폭군이다" "회의중에도 직원들에게 소리지르며 몰아세운다""엔비디아는 노동 착취 공장이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nbsp;-그렇지만 그는 비전가였다. 그리고 타고난 리더였다. 젠슨 황은 팔로알토의 변호사 짐 게이더 사무실을 찾아가 법인 설립을 요청했다. 짐 게이더는 훗날 "나는 이 사람들(젠슨 황, 커티스 프리엠, 크리스 말라초스키)이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그들을 붙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했다.-학습하는 CEO는 탁월해진다. 젠슨 황의 사무실에는 경제경영서가 가득 차 있었다. 책이 쌓이고 또 쌓였다. 젠슨 황은 문학서, 대중서는 거의 읽지 않았다. 그렇지만 경영서적에 관한한 그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nbsp;-젠슨 황의 애독서는 크리스텐슨이 쓴 '혁신 기업의 딜레마'이다.&nbsp; 크리스텐슨 교수는 "고객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옳을 때가 있다. 때로는 이윤이 적고 성능이 낮은 제품이 투자하는 것이 옳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소비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소비자는 피처폰을 쓰면서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내놓자 그때서야 피처폰이 불편하다고 느꼈다.&nbsp;◆ 설거지 대만 소년 -> 세계 최고 CEO-젠슨 황은 1963년&nbsp;대만 타이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황런쉰(Huang Jen-Hsun)이다. 1972년 부모는 더 나은 교육을 위해 9살 젠슨 황과 형을 미국으로 보냈다.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nbsp;그들이 도착한 학교는 명문 기숙학교가 아니라 켄터키주에서 문제 청소년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실제로는 소년원에 가까웠다. 이곳에서 그는 또래보다 훨씬 어린 학생이었고 동양인 소수자였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nbsp;10대 시절 그는 가족을 돕기 위해 식당에서 일했다. 식당 설거지(dishwasher), 웨이터 보조 등을 했다. 하루 종일 접시를 닦으며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나는 평생 접시를 닦을 것인가, 아니면 내 삶을 바꿀 것인가.”이 경험은 이후 그의 강한 근성(work ethic)을 만들었다.-젠슨 황의 고교 시절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그는 월반을 했다. 내셔널 아너 소사이어티에 선발됐다. 집중력이 탁월했다. 그는 하버드대에 합격할 수도 있었지만 오리건주립대를 졸업했다. 오리건주립대는 가장 높은 순위의 공립학교는 아니었다.&nbsp;그는 "그냥 가장 친한 친구를 따라갔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한 친한 친구는 베드하이덴으로 오리건주립대 동문 집안이었다.&nbsp;-오리건주립대 재학중 젠슨 황은 부인 로리 밀스(Lori Mills)를 만났다. 여학생들 가운데 가장 매력적이었다. 전형적인 서구 금발 미녀였다. 젠슨 황은 로리 밀스에게 첫 눈에 반했고 반드시 결혼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nbsp;젠슨과 로리는 1980년대 중반 친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결혼했고 가장 먼저 집을 장만했다. 이들 부부는 끊임없이 일했고 여행도 거의 다니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nbsp;장남(Spencer Huang), 장녀(Madison Huang)를 두었다.&nbsp;젠슨 황은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젊었을 때 모든 것을 걸고 창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로리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젠슨 황의 첫 직장은 AMD였다. 2년 근무 후 LSI로 이직했다. 두 직장 모두에서 젠슨 황은 탁월한 성과를 냈다.&nbsp;-1993년 그는 작은 식당에서 두 동료와 함께 회사를 창업했다. 실리콘밸리의 어느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당시 목표는 “컴퓨터 그래픽을 혁명적으로 바꾸자”였다.&nbsp;-젠슨 황은 회사 이름을 짓지 않아서 일단 NV(New Venture라는 뜻)라고 서류에 적었다. NV를 의미하는 단어들을 찾아보니 Nvision이 있었는데 재활용 화장지를 생산하는 어느 기업이 이 회사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차선으로 Nvidia를 선택했다. 이는 질투(invidia)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nbsp;-그는 여러 차례 망할 뻔한 위기를 겪었다.&nbsp;-엔비디아 설립 2개월 후 '쥬라기 공원'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처음으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와 실사 장면을 통합했는데, 이를 구현하는데 어마어마한 컴퓨팅 파워가 소모됐다. 티라노사우르스가 나무를 부수고 나오는 3초 짜리 장면을 완성하는데 애니메이터들이 10개월을 작업했다. 여기서 그는&nbsp;완벽하게 실패했다. 자금난, 직원 대량 해고 직전까지 갔다.&nbsp;-젠슨 황은 나중에 “엔비디아가 살아남은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라고 말했다.&nbsp;-해고를 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채용을 철저하게 하는 것이다.&nbsp;-젠슨 황은 가족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단 한명도 엔비디아에 채용하지 않았다. 대신 부동산을 나눠주었다.&nbsp;-인생의 가장 큰 리스크는 리스크를 대면하지 않는 것이다.&nbsp;-“나는 여러분이 매우 큰 고통을 겪기를 바란다. 그것이 성공의 가장 좋은 준비이기 때문이다."-“나는 매우 어려운 일을 겪었기 때문에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Tue, 10 Mar 2026 14:46:4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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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승자독식사회, '세계 1등' 아니면 설 자리가 없는 세상 왔다</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50356</link>
			<description><![CDATA[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 미국 코넬대 교수, 필립 쿡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부제 : 20 대 80 사회&#39;에서 &#39;1 대 99&#39;의 사회로. 당신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08년 03월 03일 | 원제 : The Winner-Take-All Society- 1980년대 중반이 되자 한국 성인의 60% 이상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답변했다. 미국이 1950년대에 도달할 지점을 30년이 지나 도달한 것이다.&nbsp;- 1979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의 상위 1%의 소득 계층은 실직 소득이 두배 이상 증가한 반면 미국인들의 평균 소득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더욱이 하위 20%의 소득 계층은 소득이 10% 감소했다.&nbsp;- 이 결과 사회적인 연대 의식이 무너졌다. 한국인의 사회 연대 의식은 1997년 외환위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nbsp;- 주디스 크란츠는 1989년 소설 (Scruples)을 출간하고 나서 이 소설을 홍보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를 소개한 적이 있다.&nbsp;"책을 홍보하며 여행하는 일, 그것은 전쟁이다. 여기저기 돌며 내 책을 홍보하던 때가 기억난다. 나는 한반중에 어느 도시 - 이를테면 클리블랜드....(더 쓸 것)기술 혁신은 1등에게 모든 것을 보상하는 경향을 가져온다. 1등과 2등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1등을 위한 노력은 치열해진다.&nbsp;이 현상은 미국에서 1990년대에 강화됐다. 정보기술, 인터넷이 확산되는 시기와 일치한다.&nbsp;1990년대 이전만 해도 미국에서는 상위권 학생중 상당수가 집 근처에 있는 주립대에서 가정 형편에 맞는 비용으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가 되자 상위권 학생들 대부분이 북동부에 자리잡은 최고 명문대에 지망했다. 그리고 해마다 4월이면 대부분의 응시생들이 불합격 통지서를 받고 낙담한다. 겨우 17세밖에 되지 않은 그들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들 중 몇개가 닫히는 좌절을 경험한다.- 제너럴 모터스는 1958년 시보레 - 차 뒤에 테일핀(Tailfin) : 자동차 트렁크의 양편을 꼬리날개 모양으로 장식한 것 - 이 없는 미국 최초의 자동차를 출시하면서 급성장했다.&nbsp;- 인기배우들, 인기 가수들,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어마어마한 보수를 받는 이유는 전자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조금만 비용을 추가해도 재생산되거나 복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스터 테이프가 녹음되면 일류 소프라노 가수의 노래를 CD에 옮겨담는 것이나 대역 가수의 노래를 옮겨 담는 것이나 비용을 똑같다. 일단 영화 촬영이 끝나면 아카데미 영화를 한통 더 인화하는 것이나 B급 서부영화를 더 인화하는 것이나 비용은 동일하다. 이렇게 최고 실력자들이 생산해낸 재화나 용역을 생산해내는데 비용이 조금밖에 들지 않는다면 재능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ㄷ르이 시장에 발을 들여놓을 여지는 줄어든다.- 영국의 유명 소프라노 가수였던 엘리자베스 빌링턴은 1801년 영국 런던에서 1만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이는 당시에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빌링턴의 노래를 보다 대중화시킬 수 없었다.&nbsp;그런데 현대에 들어와 기술 개발이 이뤄지면서 최고 실력자들은 더 넓은 시장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음반 산업에서는 현장감이 살아있는 뛰어난 녹음 기술이 출현했다.&nbsp;재화나 서비스의 운송 비용이 점점 하락하고 있다. 18세기에는 도로와 운하가, 19세기에는 거대한 철도망이, 그리고 20세기에는 광활한 고속도로망이 화물 운송 통로가 되줌으로써 물류비가 극적으로 감소했다. 최근에는 항해술의 기술적 진보, 항공 운송량의 증가, 관세 장벽의 철폐 등으로 시장이 국경 너머로 확산되는 추세이다.1, 2차 세계 대전 기간을 제외하면 산업 혁명 이후 서구의 국제 교역량은 계속 증가해왔다.&nbsp;- 창작자가 뜨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원거리 통신과 정보기술의 발달이다.- 1950년대 시티뱅크 은행장이던 월터 리스턴은 시티뱅크 뉴욕 본사가 해외 지사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들려주었다.&nbsp;"해외 지사와 통화하려면 하루 이상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일단 전화가 연결되면 , 언제든 다시 통화할 수 있도록 하루 종일 수화기를 든 채 큰 소리로 책이나 신문을 읽어대곤 했습니다."해외 지사장들은 &#39;다이얼 돌리는 사람&#39;을 여럿 고용했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39;혹시 전화가 연결되지 않을까&#39;하는 희망을 품고 하루종일 전화기 앞에 앉아 다이얼을 돌리는 일이었다.&nbsp;그런데 1966년 최초의 통신 위성이 발사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1976년에는 대서양을 연결하는 전화선이 6개 추가되면서 동시ㅔ 4,000 회선이 통화할 수 있게 됐다. 1988년에는 대서양을 잇는 최초의 광섬유 전화선이 설치되면서 동시에 4만 회선의 통화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동시에 150만 회선이 통화할 수 있게 됐는데, 이중 상당수는 위성을 통해 연결됐다.정보 처리 능력도 발전했다.&nbsp;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 증가율은 197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nbsp;- 미국 기업 임원들의 보수는 1980년대부터 뛰기 시작했ㄷ. 미국의 대표적인 대기업 CEO들이 벌어들이는 총수입은 1974년의 경우 보너스나 인센티브를 제외하면 제조업 노동자 평균 임금의 35배였다. 그러나 이제 그 수치는 150배로 뛴 상태이다.&nbsp;1993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상위 20위권내의 전문경영인은 연간 1,000만달러(약 100억원) 이상의 수입을 거두었다. 1위는 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스너로 2억 300만달러였다. 이 금액은 중남미(?) 섬나나 카리브해의 GNP와 동일했다.&nbsp;- 또, 창작자들의 작품은 OSMU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nbsp;- 스타 배우의 치솟는 몸값은 1980년대부터 강화됐다. 1988년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토탈리콜에 출연하고 1,100만달러를 받았고, 1990년 마이클 더글러스는 에 출연하고 1,500만달러를 받았다. 1994년 슈워제네거는 에 출연하고 1,500만달러의 개런티에 1퍼센트의 러닝 개런티를 받았다. 에 출연한 에디 머피와 에 출연한 브루스 윌리스도 이와 비슷한 액수를 받았다. 심지어 아역스타 매컬리 컬킨도 에 출연하고 800만달러를 받았다. 맬 깁슨과 케빈 코스트너는 영화 한 편당 1,000만달러 이상의 개런티를 받는다.&nbsp;- 베트남전쟁으로 미국은 소란스러웠지만 고용 사회는 더 확고해졌다. 전반적으로 소득 수준이 상승해 아메리칸 드림 - 교외에 있는 주택, 두대의 자동차, 자녀들의 대학 교육- 의 혜택을 받았다.&nbsp;-고용 사회는 1974년 오일 쇼크로 충격을 받았다.- 1980년대의 미국 체조 선수 크리스티 필립스는 한때 유망주였다. 그녀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자신과 다른 선수들의 몸무게를 인위적으로 줄이기 위해 설사약과 갑상선약, 이뇨제를 먹어야 했다. 필립스는 체중조절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자 체조 선수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폭식증에 시달렸다. 그녀는 "몸무게가 44킬로그램인데도 속을 꽉 채운 크리스마스 칠면조 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nbsp;필립스는 왼쪽 손목을 삐는 바람에 하루에 열두알의 에드빌(진통제)과 여섯알의 나프로신(항생제)을 먹었다. "그런 상태로 3년을 훈련했습니다. 삔 손목이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거든요."&nbsp;필립스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 자격이 주어지는 미국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몇일 뒤 그녀는 자살하기 위해 손목에 칼을 그었다.&nbsp;- 해결 방안? 없다. 작가는 상위 1%에게 높은 세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세금으로 해결될 사안이 안디ㅏ.&nbsp;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투자 기회는?&nbsp;삶이 갈수록 빡빡해진다. 세상을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그랬고, 이제는 발버둥치는 지경인데도 더욱 그렇다. 하루하루가 숨이 턱턱 막힌다. 조금만 더 이런 상태로 지내다가는 쓰러질 것 같다.&nbsp;도대체 나는 왜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됐을까?로버트 프랭크는 에서 그 이유를 당신이 &#39;적당히 재능있는 사람&#39;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nbsp;적당히 재능 있는 사람이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상위 1%가 아닌 나머지 사람들을 말한다. 적당히 재능있는 사람은 인터넷과 미디어가 발달하기 이전에는 그럭저럭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nbsp;"원시인들은 밤에 모닥불 주위에 둘러 앉았을 때 분위기를 돋워줄 구성원을 필요로 했다. 마을 마다 이런 분위기 돋워주는 구성원이 각각 존재했다. 이 구성원은 그 마을에서 1인자이기만 하면 됐다. 세상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마을 바깥 세상과 교류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nbsp;그런데 인터넷, SNS의 발달로 그 마을에서 &#39;적당히 재능있는 사람&#39;은 이제 소용이 없어졌다. 예를 들어 전 세계의 병원들이 초고속 통신망으로 연결되면서 세계 최고의 신경 외과 의사는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됐다. 초고속 통신망 시대 이전에 이런 환자를 진료하던&nbsp;&#39;적당히 재능있는 의사&#39;는 이제 설자리가 없다.&nbsp;세계 최고 유명 작가의 소설, 세계 최고 유명 영화배우의 영화는 이제 세계의 폭넓은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적당히 재능있는 소설가나 영화배우는 이제 설자리가 없다.1,000년 전만 해도 마을의 보배로 여겨졌을 &#39;적당하게 재능있는 사람&#39;은 이제 자신의 재능을 포기하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의 통신 기술 덕분에 그는 날마다 세계의 일인지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각 분야마다 10명 남짓의 챔피언들만 있어도 세상은 잘 굴러간다.:(P.15-16)예를 들어 전 세계의 병원들이 초고속 통신망으로 연결되면서 세계 최고의 신경 외과 의사는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됐다. 초고속 통신망 시대 이전에 이런 환자를 진료하던&nbsp;&#39;적당히 재능있는 의사&#39;는 이제 설자리가 없다.&nbsp;세계 최고 유명 작가의 소설, 세계 최고 유명 영화배우의 영화는 이제 세계의 폭넓은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적당히 재능있는 소설가나 영화배우는 이제 설자리가 없다.&nbsp;승자 독식 사회를 차지하고 있는 상위 1%는 누구일까.&nbsp;보리스 베커(테니스 스타), P.D. 제임스(미스터리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소설가), 제라르 드파르디유(영화배우), 멜 깁슨(영화배우), 조지 소로스(투자자), 다이앤 소여(뉴스 앵커), 조르지오 아르마니(패션 디자이너), 스티븐 호킹(물리학자), 존 그리샴(작가)가 여기에 해당한다. 법률, 언론, 컨설팅, 의료, 투자, 경영, 출판, 디자인, 패션 그리고 신선한 학문의 세계에 이들은 포진해 있다.승자 독식 사회에서 이들은 재화와 서비스의 흥행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영화 한편을 만드는데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필요하지만 흥행을 결정하는 것은 감독, 시나리오 작가, 주연 배우의 3인이다. 나머지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한들 흥행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대기업은 세금을 줄이기위해 고심한다. 이때 가장 유능한 세무 전문 변호사 1인에게 의뢰하면 기업은 세금을 수천만달러를 절감할 수 있다. &#39;적당히 재능있는 변호사&#39; 수십명에게 의뢰한들 이런 효과를 거둘 수 없다.&nbsp;그렇기에 이들 승자(winner)가 받는 수입은 절대적으로 높다.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1993년과 1994년 사이에 3억 3,000만달러(약 3,700억원)의 소득을 거둬 미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 연예계 1위를 기록했다. 1993년 디즈니사의 최고경영자(CEO) 마이클 아이스너는 회사 성과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성과급을 2억달러(약 2,000억원)을 받았다. 소설가 다니엘 스틸은 소설을 한 권 쓸 때마다 1,200만달러(약 130억원)을 받는다.&nbsp;이들은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nbsp;"미국 뉴욕주에서는 날마다 수백만 달러짜리 거래가 수백건씩 성사되지요. 날마나 수십명의 기업 임원이 승진하고, 수십명의 변호사가 수임료를 받고, 수십명의 소송 의뢰인이 법정에서 승소합니다. 그들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자축을 하는데, 이때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를 주문합니다." (p.65)&nbsp;지구촌이 점점 승자 독식 사회로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조사에 따르면 1979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에서 소득 상위 1%의 계층은 실질 소득이 두배 이상 증가한 반면, 미국인들의 평균 소득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하위 10% 계층은 소득이 10% 감소했다. 2010년 현재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의 명문가가 미국의 총자산 가운데 37%를 소유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1977년에는 소득 상위 20%의 사람들이 하위 20%의 사람들보다 4배 정도 많은 소득을 거두었지만 1991년에는 이 차이가 7배로 확대됐다.&nbsp;승자 독식 사회의 특징은 승자가 받는 보상은 절대적 능력이 아니라 상대적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재능이나 노력의 미미한 차이가 엄청난 소득의 차이로 이어진다.&nbsp;예를 들어 바이올린, 피아노 등 고전 음악 시장에서 해당 분야마다 상위 1% 연주자가 있는데, 이들 상위 1% 연주자와 나머지 연주자와 차이는 일반 소비자의 관점에서는 차이를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작다. 그럼에도 상위 1%에 어마어마한 부가 집중된다. 경쟁자들의 조그마한 차이가 경제적 보상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낳는 것이다.&nbsp;이는 스포츠에도 적용된다. 1993년 4월 테니스 스타 모니카 셀레스가 관중에게 칼이 찔려 활동을 중단하자 2인자였던 슈테피 그라프는 절대적 수준에서 경기력이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1992년에 비해 두배 많은 상금을 거머쥐었다.&nbsp;-승자 독식 시장의 문제점은 개선될 가능성이 있는가. 이런 치열한 경쟁의 뒤안길에 내 몸 하나 숨길만한 그런 공간은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는다.&nbsp;승자 독식 사회를 뒷받침하는 복제 기술의 발달, 세계를 하나로 묶는 연결망 경제가 더욱 공고해지고 있고 각국의 재화와 서비스의 운송 비용은 점차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자동차 부품 업체 노동자들은 인도의 자동차 부품 업체 노동자들과 경쟁해야하고, 한국의 의류 업체 노동자들의 중국의 의류업체 노동자들과 경쟁해야 한다.&nbsp;지금은 누구나 상위 1%가 되거나 몰락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이런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nbsp;미국 체조 선수 크리스티 필립스는 한때 메리 루 레턴의 뒤를 이을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그녀는 사춘기 때부터 상위 1%에 들어서기 위해 신체를 가혹하게 다루었다.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설사약, 갑상선약, 이뇨제를 먹었고, 폭식증에 시달렸다. 그는 훈련을 하다 왼쪽 손목을 삐었지만 그런 상태로 하루 열두알의 애드빌(진통제)과 여섯알의 나프로신(항생제)를 복용하며 3년을 보냈다. 삔 손목이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필립스는 1988년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에 탈락했다. 몇달 뒤 그녀는 자살 하기 위해 손목을 칼로 그었다.-승자 독식 사회가 심화되면 갈등이 폭발해 역사의 수레바퀴가 뒤로 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앞으로 마주 대해야 할 날들은 승자 독식 사회임이 분명핟.&nbsp;- 무역협정 때문에 토론토의 노동자들은 시카고의 노동자들과 직접 경쟁하게 됐고, 도쿄의 노동자들은 뮌헨과 요하네스버그의 노동자들과 직접 경쟁하게 됐다.&nbsp;- 승자 독식 사회는 이미 중대한 사회, 경제적 변화들을 가져왔다. 이런 현상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으며, 앞으로 훨씬 더 극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nbsp;-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커지면서 사회적 연대가 무너지고 있다. 최상위 소득 계층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부유하지만 현재의 사회 문화적인 유산을 그대로 미래 세대에 전해주고 싶어하지는 않는다.&nbsp;- 갑자기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합의된 답변이 도출되지 못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경쟁력의 약화로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보다 더 경쟁이 치열했던 적은 없었다.&nbsp;- 어떤 분야의 자격증이 있어도 일류 대학의 졸업장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미국의 엘리트 교육기관은 미국 젊은이가 사회에서 가장 선망받는 직업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 됐다. 몇년 전만 해도 미국의 고등학교의 상위권 학생의 상당수가 집 근처에 있는 주립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미국 동부의 명문 대학에 한사코 지원한다. 해마다 4월이면 이들의 대부분이 불합격 통지서를 받고 낙담한다. 스무살이 채 되지 않은 이들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 가운데 몇개가 닫히는 소리를 들어야한다.&nbsp;- 성형수술이 증가하는 것도 승자 독식 사회의 단면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의 장의사들은 턱과 가슴과 엉덩이 확대에 사용된, 불에 타지 않는 실리콘 때문에 화로가 막힐 지경이라고 불평하고 있다.&nbsp;- 상대적인 능력차에 의해 보상을 받는다는 점이 승자 독식 시장을 다른 시장과 구별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nbsp;- 공급 측면에서 볼 때 승자 독식 시장이 등장하게 된 가장 궁극적인 원인은 최고 실력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비용을 조금만 추가해도 재생산되거나 복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단 테이프가 완성되면 일류 소프라노 가수의 노래를 CD에 옮겨 담는 것이나 대역 가수의 노래를 옮겨 담는 것이나 똑같다.&nbsp;- 수요 측면에서 승자 독식 시장을 발생시키는 요인은 부의 편중이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명문가가 미국의 총자산의 37%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부를 동원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수있고, 이는 &#39;주머니가 두둑한 소수 구매자 독식 시장&#39;을 탄생 시킨다. 부자들은 자신의 명예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최고의 변호사를 확보하려 한다. 수임료가 아무리 비싸도 신경쓰지 않는다.&nbsp;- 미국의 독립 선언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 전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변화가 한가지 있다. 재화와 서비스의 운송 비용이 점점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nbsp;- 일류대학의 학위가 없으면 전문직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nbsp;- 문화 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실력자들의 서비스가 매우 낮은 가격에 재생산될 수 있다. 영화, TV, 책, 신문 덕분에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재능있는 배우, 코미디언, 가수, 작가, 칼럼니스트, 뉴스 진행자들을 언제든지 접할 수 있다.&nbsp;- 사회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은 최고상이 커졌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하층부에 있는 사람들은 더 밑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nbsp;- 처음에 조금 앞서가면 결국에는 남들이 따라 잡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앞서갈 수 있다.&nbsp;- 기업 경영에서 의사 결정의 내용이 조금만 바뀌어도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따라서 기업들은 탁월한 의사 결정으로 명성을 쌓은 최고의 후보자를 CEO로 뽑기 위해 경쟁적으로 연봉을 높이게 된다. 차점자와의 능력차이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말이다.&nbsp;]]></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Fri, 30 May 2025 07:55: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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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삼성, 신화경영의 대가</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8066</link>
			<description><![CDATA[삼성, 신화경영의 대가. 김찬웅. 세종미디어(이서). 2024. 6. 1.&nbsp;"집에 연락할 일은 없습니까?"&nbsp;"전화를 좀 하고 싶소."&nbsp;"알겠습니다."&nbsp;이병희 중령은 순순히 전화기를 갖다 주었다.&nbsp;호암은 집에 전화를 걸어 를 걸어 "지금 돌아왔다. 나는 무사하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렀다. 몇 달 만에 듣는 가족의 목소리인가.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반가웠다.&nbsp;다음 날인 6월 27일 아침 9시쯤 이병희 중령이 호텔로 호암을 찾아왔다. 호암은 그와 함께 다시 지프를 타고 퇴계로에 있는 참의원 회관훗날 원호처로 바뀜 으로 갔다. 이병희 중령이 호암을 100평쯤 되는 넓은 방으로 안내했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군인 몇 명과 함 께 방 저쪽에서 걸어왔다.&nbsp;작은 키에 바싹 마른 체구, 강인한 인상.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그가 바로 5&middot;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었다.&nbsp;"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하지 않으셨습니까?"&nbsp;박 부의장이 부드럽게 물었다. 뜻밖이었다. 팽팽하게 가슴을 조여오던 긴장감이 어느 정도 풀어져나갔다.&nbsp;"지금 우린 11명의 부정축재자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nbsp;(중간 생략)&nbsp;그는 밖에 대기하고 있던 이병희 중령을 불러 그 이유를 묻고, 곧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호암은 박 부 의장과 악수를 나누고 이병희 중령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nbsp;다음 날 아침 일찍 이병희 중령이 호암을 찾아와 이제 그만 집으 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호암은 혹시 다른 경제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nbsp;"아직 그대롭니다."&nbsp;"그럼 나도 갈 수 없소."&nbsp;"왜 그러십니까?"&nbsp;"그분들은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입니다. 부정축재자 1호인 나는&nbsp;호텔에 편히 있다가 집에 가고, 자신들은 이 더운 여름날 감옥에 갇혀 있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나중에 내가 그 사람들을&nbsp;무슨 얼굴로 보겠습니까? 차라리 나도 감옥으로 보내주시오."&nbsp;호암은 그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자신도 집에 갈 수 없다고 버텼다. 이병희 중령은 호암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 들었다.&nbsp;"참 어쩔 수 없는 분이군요."&nbsp;이병희 중령은 다음 날 다시 호암을 찾아와 잡혀간 경제인들이 모두 풀려났다며 말했다.&nbsp;"이제 그만 돌아가시죠."집으로 돌아온 호암은 이후 부정축재 문제로 여러 기관에서 찾아 오는 조사원들에게 시달렸다. 고단한 나날이었다. 호암은 어쩔 수 없이 조사에 응했고, 똑같은 설명을 몇 번씩 되풀이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참다 못한 호암은 이병희 중령에게 한 기관에서 조사를 받게 해주든지, 아니면 아예 호텔에 다시 가둬달라고 부탁했다. 이병희 중령은 즉시 호암의 집으로 헌병을 보내고, 미리 허가를 받아야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제야 호암은 간신히 조사 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구속되고, 박정희가 의장이 되었다.며칠 후 박정희 의장이 한남동에 있는 한식집으로 호암을 불러 물었다."이 사장, 경제인들 사이에서 부정축재로 벌어들인 돈을 내놓으라는 것에 대해 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nbsp;박 의장의 말투는 거칠었다. 기업인들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한 듯했다.&nbsp;(중간 생략)&nbsp;"당연한 일 아닙니까? 내라는 대로 다 내면 살아남을 기업이 없을겁니다.(중간 생략)&nbsp;"그래요."&nbsp;호암은 단호하게 말했다.&nbsp;"그럼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처음 의장님을 만났을 때 말씀드렸듯이 기업인들을 나라 경제를...."&nbsp;"다만 정 일으키는 데 활용해야 합니다."&nbsp;느 분야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오."&nbsp;"먼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묶어놓은 경제인들을 풀어주셔서 "그 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부정축재로 내야 "네.&nbsp;할 돈을 크게 줄여주시고, 그 돈을 전부 국가 기간산업에 투자하도록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국민들에게 부정축재자들을 대충 처리한 다는 인상을 줄까 봐 망설이시는 것 같은데, 그 문제는 정부가 공개 일에 적으로 강력한 투자명령을 내리면 해결될 것입니다."&nbsp;"투자명령?"&nbsp;"그렇습니다. 부정축재한 돈에 너희들 돈을 보태서 나라 경제에 필요한 공장을 지으라고 하고, 공장을 다 지은 후에는 부정축재한 돈만큼의 주식을 정부에 내라고 하는 겁니다."&nbsp;"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기업인들이 투자명령을 받아들이(중간생략)&nbsp;"돈을 낼 시간을 벌 수 있는 일을 마다할 기업인은 아마 없을 겁 니다. 정부도 그때 가서 과연 나라에 해를 끼쳤는지, 이바지했는지 를 다시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nbsp;"그래요."&nbsp;박 의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암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입 가에 웃음이 묻어 있었다.&nbsp;"다만 정부는 제철, 시멘트, 비료 등으로 투자대상만 정하고, 어 느 분야에 투자할지는 기업인들이 서로 의논해 정하도록 하시면 될 겁니다. 각자 처해 있는 사정이 다르니까요."&nbsp;"그 일을 이 사장이 맡아주실 수는 없겠습니까?"&nbsp;"네. 좋습니다. 제가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nbsp;그 후 부정축재 처리 방향은 180도 바뀌었다. 8월 2일에 정부가 89개 기업에 내도록 한 금액은 모두 831억 환이었다. 하지만 8월 12 일에는 27개 기업에 378억 800만 환으로 크게 줄었다. 그중에서 삼 성이 내야 할 돈은 전체의 27%에 달하는 103억 400만 환이었다. 그&nbsp;해 말에 정부는 다시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전체 금액은 501억 환 으로 늘어난 반면 삼성이 내야 할 돈은 오히려 80억 환으로 줄었다.&nbsp;그보다 몇 달 앞선 8월 16일 정부와 기업 간의 의견을 조정하는 대표적인 단체가 생겼다. 바로 한국경제인협회 지금의 경제인연합회다. 초대 회장에는 호암이 뽑혔다. 회원은 부정축재로 구속되었던 12명 의 경제인이었다. 공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호암이었지만&nbsp;이번에는 경제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회장직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7명이 더 들어오고, 11월에는 20여 명이 들어와 회원은 모두 40명이 되었다.&nbsp;호암은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국가최고재건회의에 "대규모 공업 단지를 만들어 그곳에 공장을 짓자."는 건의를 했다. 공업단지라는 말 자체가 낯설게 들릴 때였다. 일반인들은 물론 일부 경제 관료들 조차 "공장을 지을 땅은 어딜 가든 있다. 굳이 한곳에 모아놓을 이 유가 어디 있는가?" 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답답한 일이었다.&nbsp;공장을 세우려면 먼저 전기나 물 사정이 어떤지, 육지나 바다 등 으로 물건을 쉽게 옮길 수 있는지 등등 여러 가지 조건을 살펴야 한 다. 일반 가정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고, 환경도 생각해야 한&nbsp;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곳에 대규모 공업단지를 만들어 각종 공장 을 세워야 시너지효과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공장을 짓는 것보다 돈이 덜 들어가고, 외국에서 돈을 빌리기도 쉬워진다.호암은 회원들과 함께 장소를 찾았다. 후보로 올라온 곳은 물금까 삼천포, 울산 등 세 군데였는데 그중에서 울산이 가장 알맞은 장소라는 결론이 나왔다. 호암은 그 즉시 뜻이 맞는 회원 몇 명과 울산으로 내려갔다. 삼성 일만 하기에도 바쁜 호암이었지만 그보다는 나라 경제를 살리는 일이 더 급했다. 나라가 없으면 삼성 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호암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현장을 눈으로 직접 본 호암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울산은 그야말로 모든 조건을 갖춘 은혜의 땅이었던 것이다. 1만 톤급 배5~6대가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는 잔잔한 항만, 태화강의 풍부한 물, 육로의 교통 등 거대한 공업단지가 들어서기에 최적의 장소였다.서울로 올라온 호암은 총회 때 답사 내용을 말하고 「울산공업단 지 건설계획서」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출했다. 계획은 그대로 받 아들여져 1962년 2월 3일 울산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그 자리에 참 석한 박 의장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축사를 했다.&nbsp;"...4000년 동안 이어 내려온 가난의 역사를 씻기 위해, 국민들의 간절한 소원인 나라의 번영을 위해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 기에 새로운 공업단지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nbsp;감동적인 연설이었다. 박 의장의 축사가 끝나자 호암은 천천히 현장을 둘러보았다. 4&middot;19혁명과 5&middot;16군사쿠데타로 인해 힘없이 무 너진 비료공장의 꿈이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nbsp;]]></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Mon, 26 Aug 2024 08:26:3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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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경제천동설 손절하기</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59</link>
			<description><![CDATA[경제천동설 손절하기. 진보경제학은 어떻게 한국을 망쳤나. 백광엽. 미래사. 2023. 6. 20.&nbsp;&#39;낙수효과는 없다&#39;는 억지&nbsp;진보경제학은 사실을 경시하고 왜곡한다. 대표적인 게 낙수효과 부정이다. 낙수효과 실종은 재벌과 대기업 과잉규제의 핵심 근거이기도 하다.&nbsp;홍장표 부경대 교수(문재인 정부 KDI 원장)는 "재벌대기업과 수출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과 내수기업의 성장을 유발한다는 낙수효과에 기대 규제 완화를 추진했지만, 낙수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한국은 삼성동물원, LG동물원에 중소기업들이 갇혀 있는 생태계 탓에 기업 간 양극화가 극심하다"는 주장이다.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으면 한국 경제의 미래도 없다며 소득주도성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밀어 붙였다.&nbsp;그는 또 "박정희 정부 때부터 쭉 우리는 소위 낙수효과를 바라고 주로 수출&middot;대기업 중심의 성장모델로 갔다"며 "수출이 잘 돼서 우리 가계가 좋아졌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했다. 수출중심&middot;대기업 선도 전략으로 유례없는 성과를 내고 1인당 소득(구매력 기준)에서 일본을 앞지를 만큼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기초적인 사실조차 부정하는 행태다. 학현학파 참모에 둘러싸였던 문재인 대통령도 &#39;낙수효과 부정&#39;을 경제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2019년 신년기자회견에서는 "오래전에 낙수효과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이명박 정부는 낙수 가설, 즉 부자가 먼저 더 부자가 되면 나중에는 서민도 소득이 증가한다는 가설을 근간으로 경제정책을 운용했으나, 이는 가상적 이론일 뿐 어느 나라에서도 타당성이 입증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편견과 왜곡에 기반한 비합리적 시각이다. 대기업의 투자효과가 중소기업을 살찌우고 고용을 불러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낙수 효과는 엄연히 실재한다. 신문만 펼쳐 봐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윈윈 스토리가 차고 넘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39;대기업과 거래가 많을수록 실적 개선 폭이 크다&#39;는 낙수효과 입증 연구도 부지기수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자동차&middot;트레일러 업종을 분석해 보니 관련 대기업 매출은 2010년 107조 1000억 원에서 2018년에는 141조 6000억 원으로 늘어났다. 반면 같은 업종중견&middot;중소기업 매출은 49조 1000억 원에서 70조 6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증가율을 계산하면 대기업은 32%, 중견&middot;중소기업은 44%다. 중견&middot;중소기업의 실적개선 효과 뚜렷한 점은 강력한 낙수효과의 실재를 입증한다.조동근&middot;빈기범 명지대 교수팀은 8113개 기업을 조사해 낙수효과가 명백하게 존재한다는 연구결과를 한국경제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중소협력업체가 대기업에 납품을 많이할수록 매출, 고정자산, 고용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분석이었다. 대기업의 존재가 거래업체와 국민경제에 큰 낙수효과를 불렀다는 의미다.또 조준모 성균관대 교수에 따르면 현대&middot;기아차 1차 협력사 250개사의 평균 매출은 지난 10년간 3배 가까이 늘었고, 직원 1인 당 평균 매출 역시 2.4배 증가했다. 대기업이 성장하면서 중견&middot;중소기업이 동반 급성장한 것이 낙수효과가 아니면 무엇인가. 사실 굳이 복잡한 검증도 필요 없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낙수효과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기업이든 투자와 생산을 늘리면 다른 기업과의 거래도 늘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기업과 경제의 성장 자체가 연쇄적인 낙수효과의 결과다. 진보경제학은 이런 상식적인 관점을 애써 부정한다.&nbsp;사실 진보좌파진영도 낙수효과의 존재를 잘 인식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신년사에서 "올해 총 100조 원의 대규모 투자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인센티브를 강화해 기업 투자환경을 개선하겠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의 투자확대를 유도해 경제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취지다. 낙수효과를 부정한다면 취하기 어려운 정책이다. 심지어 &#39;낙수효과는 없다&#39;며 소주성을 주창한 홍장표 교수는 낙수효과를 입증하는 논문까지 썼다. 그는 동료 장지상 경북대 교수(문재인 정부 산업연구원장)와 함께 2015년 발표한 &#39;대기업 성장의 국민경제 파급효과&#39;라는 논문에서 "대기업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한 협력기업에 낙수효과가 일정하게 발생한다"고 적었다. "낙수효과를 둘러싼 쟁점은 낙수효과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낙수효과의 크기"라고 명시했다. 낙수효과 부정이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정황이다.&#39;감세는 재벌 부자 위한 것&#39;이란 이분법&nbsp;진보경제학이 시장주의 개혁을 비난할 때 조자룡 헌 칼 쓰듯 남발하는 키워드가 부자감세다. 2022년 6월 윤석열 정부가 법인세율 인하(25% +22%) 구상을 담은 &#39;경제정책방향&#39;을 발표하자 거대 야당의 반응 역시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있는 자만 위하는 &#39;부자감세&#39;, &#39;삼성감세&#39; 노력이 눈물겹다는 식의 비아냥을 쏟아냈다.&nbsp;하지만 법인세, 포괄적으로 감세가 반서민적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억지요 &#39;뇌피셜&#39;이다. 낙수효과가 명백하기에 감세정책도 정당하다. 감세가 투자와 GDP 증가를 부른다는 것은 최근 프랑스가 재차 입증했다. 프랑스는 마크롱 대통령 집권 5년 동안 법인세 율을 33.3%에서 25%로 끌어내렸다. 그 결과 5년(2017~2022) 성장 률이 유럽 주요 5개국 중 최고가 돼 &#39;유럽연합(EU)의 경제모범생&#39; 으로 대접받는다.&nbsp;미국도 대대적 감세(35%&rarr;21%)를 단행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만만찮은 호황을 누렸다. 미국의 감세는 트럼프 이전 오바마 대통령 때부터 시작됐다. 감세정책의 효과는 한국에서도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한국경제연구원이 30년의 방대한 데이터를 돌려 보니 최고세율 1%포인트 인하 시 설비투자 증가율은 3.6%에 달했다.&nbsp;그래봐야 부자들만 좋은 &#39;반서민 정책&#39;이라는 비난도 선동에 불과하다. 김대중&middot;노무현 정부 내내 악화하던 양극화 저지에 성공한 것은 감세에 적극적이던 이명박 정부다. 반면 부자 증세와 &#39;퍼주기&#39;로 치달은 문재인 정부 때는 불평등이 다시 극심해졌다.&nbsp;양극화 지표가 너무 악화하자 애먼 통계청장을 전격 경질하고 듯 남 "좋은 통계로 보답하겠다"는 새 청장을 앉히기까지 하지 않았나. 인세 세율을 내리면 세수가 쪼그라든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이 거대 정부의 법인세율 인하(25%&rarr;22%) 첫해인 2008년 39조 원 이던 법인세수는 2018년 71조 원으로 불어났다. 세율 인하 10 년 만에 세수가 거의 2배가 된 것이다. 반면 문재인 정부 세율 인상(22%&rarr;25%) 2년 뒤인 2020년 세수는 23% 급락했다. 높&nbsp;정 은 법인세율은 근로자에게 전가돼 임금도 낮춘다. 법인세율이 10% 오르면 임금은 평균 2.5% 감소한다는 분석도 나와 있다.&nbsp;진보진영이 감세 무용론의 근거로 제시하는 주요 팩트는 딱 하나다. 이명박 정부 당시 법인세율을 낮췄지만 투자가 줄었다는 주 장을 무한반복 중이다.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불확실성 증대로 아주 잠깐 투자가 위축됐지만 금방 회복됐다는 게 &#39;진짜 팩트&#39;다.&nbsp;자칭 진보 매체와 학자들까지 가세해 새 정부 경제정책을 &#39;실패한 MB 시즌2&#39;로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다. &#39;실패한 MB&#39;라는 수식어부터 악의적 프레임이다. 이명박 정부의 성장률(OECD 대비 초과 성장률)은 외환위기 이후 정권 중 압도적 1위다. MB 정책과 정반대로 &#39;증세 후 퍼주기&#39;에 집중한 문재인 정부야말로 &#39;초과 성장률 꼴찌&#39;의 굴욕을 당했다.&nbsp;한국은 이미 대표적 &#39;부자 과세 국가다. 법인세만 보더라도 상위 1%가 84%, 10%가 97%를 부담한다. 반면 두 곳 중 한 곳은 법인세액이 제로(0)다. 이익 규모를 4단계로 나눠 고율의 누진세를 때리는 나라도 한국 말고는 별로 없다. OECD 회원국 절반 이상 은 단일세율 체계다. 기형적 &#39;부자 과세&#39; 손질로 성장률을 높이고 임금까지 올릴 수 있다면 감세를 주저할 이유가 없다.&nbsp;한국은 &#39;대기업 천국&#39;이라는 비난&nbsp;진보경제학은 대기업을 한국 경제의 공적이라고 공격한다. 빈곤은 이익을 독식하는 재벌 때문이고, 실업도 직원을 안 뽑는 대기업 탓이고, 투자가 안 되는 것 역시 기업이 금고에 돈을 쌓아두고 안 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학현학파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한국만큼 대기업 갑질이 심한 나라가 없다. 대기업이 기술을 탈취하고 가격을 후려치기 하면서 중소기업은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고도 했다.&nbsp;대기업이 잘나가는 탓에 중소기업이 취약해진다는 이상한 논변도 넘친다. 몇몇 대기업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도 버티기 힘들다며 리스크 관리를 위해서도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nbsp;장까지 나온다. &#39;삼성이 망해야 한국 경제가 산다&#39;는 식이다. 여의도 국회에서는 대기업 즉 재벌체제는 한국만의 잘못된 구조라며 적극적인 규제로 &#39;대기업 천국&#39;에서 탈피하자는 논의가 넘친다.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것이며, 악의적 프레임에 불과하다.한국이 &#39;대기업 천국&#39;이라는 기본 전제부터 틀렸다. 한국 100대 기업의 매출집중도(전체 기업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는 45.6%로 OECD 주요 19개국 중 15위에 불과하다. 캐나다가 79.1%로 고공비행 중이고 미국&middot;독일 &middot;프랑스도 전부 50%가 넘는다. 30대 기업의 매출집중도 순위도 19개국 중 14위로 낮다.&nbsp;매출집중도 절대치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100대 기업의 매출집중도는 2011년 58.1%에서 2020년 45.6%로, 10년 새 10%포인트 이상 낮아졌다. 같은 기간 30대 기업 집중도도 42.1%에서 31.1%로, 10대 기업 집중도는 26.1%에서 19.6%로 급락세다.&nbsp;자산집중도(전체 기업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로 비교해도 마찬가지 다. OECD 19개국 중에서 100대 기업과 30대 기업의 자산집중도는 공히 15위에 머문다. 10대 기업도 13위로 하위권이다. 자산집중도 역시 최근 10년 새(2011~2020) 100대 기업은 59.1%에서 50.6%로 크게 낮아졌다. 100대 기업의 자산증가율은 연평균 2.7%로 100대 미만 기업(6.7%)을 훨씬 밑돌았다. 같은 기간 30대 기업 자산집중률은 42.1%에서 36.3%, 10대 기업 역시 27.9%에&nbsp;서 24.2%로 줄었다. 0.07개로 주요국 중 인구 1만 명당 대기업(500인 이상 제조업) 수도&nbsp;최저다. 독일은 0.21개로 우리의 세 배다. 일본(0.14개), 미국(0.13개), 영국(0.11개)도 한국보다 많다. 대기업의 &#39;단가 후려치기&#39;도 필요 이상의 비판은 금물이다. 조 벽이 웃&nbsp;선업을 들여다보면 협력사의 영업이익률(2001~2010)이 연 7.3%로,&nbsp;조선 대기업(7.0%)보다 높다. 설사 대기업의 후려치기가 있었다.&nbsp;하더라도 통상적인 갑을(계약) 관계에서 용인되는 범위 이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결과다. 사회사업이 아닌 비즈니스 세계 수 에서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후려치기라 경 고 비난한다면 코미디일 뿐이다.&nbsp;대기업 위주의 성장은 분배를 왜곡하기 때문에 안 하느니만 못한 &#39;나쁜 성장&#39;이라는 주장은 자해적이다. 해외에서 벌어서 안을 살찌우는 게 한국의 대기업들이다. 한국 100대 기업은 해외 매출 비중이 55%, 10대 기업은 65%, 5대 기업은 75% 수준이다.&nbsp;삼성전자-SE하이닉스&middot;LG디스플레이&middot;벨트리온헬스케어 같은 일류 기업들은 이 비중이 80~100%다. 해외에서 벌어서 탄탄한 중산층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다.&nbsp;대기업은 &#39;성공한 중소기업&#39;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며 수익을 내고 고용을 창출하며 경제를 살찌우는 대기업이 지금보다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 대기업을 한국 경제의 적폐로 모는 공격은 &#39;나쁜 정치&#39;에 의한 부당한 관여다.&nbsp;&#39;오너 경영 &middot; 순환출자는 후진적&#39;이라는 단견&nbsp;한국의 경쟁력이 일본을 따라잡았다. 국가경쟁력&middot;신용도 등에서 한국이 일본을 제친 것이다. 20~30년 전만 해도 일본은 미국과 경쟁하는 초일류국가로 &#39;노는 물&#39;이 달랐다. 요즘 말로 하면 넘사벽이었다. 일본에서 배워서 한참 뒤늦게 산업화에 착수한 역사까지 감안하면 감개무량한 사건이다.&nbsp;모두의 공이겠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대기업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다. 세계 일류로 성장한 대기업 덕분에 국가경쟁력, 제조업 경쟁력, 1인당 GDP(구매력 기준)에서 일본을 앞지른 게 분명한 사실 이다. S&P, 무디스, 피치 등 3대 국제신용평가기관의 국가신용등급은 한국이 일본보다 2단계 높다. S&P의 경우 1990년에는 한국의 신용이 &#39;A+&#39;로 일본(AAA)보다 4단계 낮았지만, 이제 &#39;AA&#39;로 일본(A+)보다 2단계 높다.&nbsp;물가와 환율수준을 반영해 국민의 구매력을 측정하는 1인당 경상 GDP 역시 PPP(구매력평가) 기준으로 이미 2018년에 한국(4만 3001달러)이 일본(4만 2725달러)을 따라잡았다. 제조업 경쟁력도 추월 했다. 유엔산업개발기구(UNDO)의 세계제조업경쟁력지수(CIP)를&nbsp;보면 1990년 한국과 일본은 각각 17위, 2위였다. 하지만 2018년&nbsp;에는 한국이 3위, 일본은 5위로 역전됐다.&nbsp;진보경제학은 이런 성과의 의미를 축소하고 기업을 폄하하기 바쁘다. 재벌이 족벌경영 하면서 이익을 독식 중인데 경제성장이 대수냐며 재벌개혁 불가피론을 설파한다. 하지만 이들이 재벌개혁의 근거로 제시하는 이론과 팩트의 대부분은 천동설처럼 시효가 지난 낡은 세계관이다. 오너 경영과 순환출자를 범죄시하는 것부터 그렇다. 작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휘두르는 오너 체제 나 순환출자를 기형적 지배구조라 생각하는 건 과도한 이분법이다.&nbsp;소위 &#39;피라미드형 오너 경영체제&#39;는 전 세계 기업들의 가장 보편적 지배구조다. 오히려 전문경영인 체제가 미국과 영국의 주요 대기업들에서만 목격되는 예외적 모델이다.&nbsp;한때 전문경영인 체제가 &#39;글로벌 스탠더드&#39;로 간주된 적도 있 었다. 하지만 해외 기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던 지난 세기에 누 군가의 과장과 악의가 보태져 생긴 오해였음이 확인됐다. 전문경 영인 체제가 많다는 미국에서도 161만 개(2013년 기준)의 법인 중 전문경영기업은 전체 법인의 0.2%에 불과하다.&nbsp;전문경영인 체제가 우월하고 오너 경영은 열등하다는 증거도 없다. 세계 경제를 앞장서서 이끌고 있는 미국 테슬라, 아마존, 페이스북의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마크 저커버그만 봐도 오너 경영의 보편성과 장점이 만만찮음을 직감할 수 있다. OECD 회원국의 3분의 2는 대주주가 보유한 주식에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기까지 한다. 저커버그의 페이스북을 비롯해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구글 모회사 알파벳 등이 그런 회사들이다.&nbsp;맨손으로 출발해 세계 일류로 부상한 한국 기업들의 성공도 오너 체제의 장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부족함이 없다. 전문경영인 체제도 장점이 있지만 단기성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단점 역 시 분명하다.&nbsp;지금은 대부분 해소된 순환출자 역시 한국 대기업만의 후진적 지배구조가 아니다. 순환출자는 도요타, 도이체방크, LVMH 등 업종불문하고 무수히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애용하는 수법 이다.&nbsp;오히려 한국은 순환출자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세계 유일 국가다. &#39;대기업이 자원배분을 왜곡하고 집중을 심화시킨다&#39; 는 기업패권가설이 구미에서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분석으로도 가설이 입증되지 않아 지금은 효력을 상실했다. 경쟁 의 범위가 전 세계로 확산된 마당에 자원배분 왜곡 주장은 국내 시장만을 염두에 둔 좁은 시각이다.&nbsp;물론 재벌에는 고칠 점이 많다. 글로벌 위상에 걸맞은 책임을 껴안아야 한다. 지배구조를 더 투명하게 하고 책임경영을 강화하 며 사회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변화도 기본적으로 대기업 스스로의 몫이다. 정부가 기업을 잠재적 범죄자나 피의자로 여기고 특정 방향을 강제하겠다는 생각은 월권이 자 나쁜 간섭이다. 정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자가 아니다.&nbsp;정부를 대리하는 공무원이야말로 업무 전반의 공정과 효율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해 의사결정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게 현대경제학이 내린 반전 결론이다. 어떤 공직자가 자신의 능력과 도덕성을 과신한다면 그 자체로 자만이거나 위선일 개연성이 높다.&nbsp;&#39;재벌은 특혜 덩어리&#39;라는 오해&nbsp;&#39;무조건 항복 당시 한반도의 일본인은 70만 명이었다. 이들은 해방 무렵 국내 주요 산업시설의 94%를 소유했다. 갑작스러운 해방에 일본인들은 허겁지겁 귀국길에 오르며 재산을 국내에 남겼다. 그렇게 두고 간 일제와 일본인 소유의 재산은 몰수 조치돼 적산으로 불렸다.&nbsp;광복 당시 조선인이 경영하는 소위 민족기업은 극히 소수였다. &#39;호남의 지주 김연수가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해 만주까지 진 출하고 &#39;조선의 유통왕&#39; 박홍식이 인쇄업과 종이장사로 시작해 1931년 화신백화점을 차려 주목받은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은 경제건설의 중요한 자원이었다.&nbsp;북한은 소련 고문단의 코치 아래 일찌감치 적산을 국유화했다. 하지만 미 군정청은 민간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시간 을 끌다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로 소유권을 인계했다. 적 산을 넘겨받은 이승만 정부는 1949년 &#39;귀속재산처리법&#39;을 제정하고 미 군정청이 1947년부터 시행한 방식을 토대로 신속한 민 간 불하를 실시했다. 그렇게 미 군정기와 이승만 정부 시기 불하 된 적산기업은 2700여 개에 달했다.&nbsp;이 &#39;적산&#39;의 특혜 불하가 &#39;재벌 탄생의 기원&#39;이라며 맹렬히 공격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아래에서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헐값에 불하받아 태동했다"(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는 주장이다. 출발부터 특혜를 입었으니 재벌은 국민기업이라는 식의 비약도 나온다.&nbsp;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 한국 주요기업 대부분은 적산 불하와 공정거래위원회가 2021년 5월 지정한 한국의 71개 대기업집단(재벌) 가운데 적산 불하가 기업집단 형성의 계기가 된&nbsp;사례는 SK, 한화, 두산, 애경 등 4곳에 그친다. 71곳 중 4곳이니 비율로는 6%다. 나머지 94%(67개)는 적산 직접 불하와 무관하다.&nbsp;1949년 말에 시작해 1963년 5월에 종료된 적산 불하 과정에서 특혜가 수반된 것은 사실이다. 불하가격이 시가보다 훨씬 낮게 책정됐고, 최장 15년 연부상환도 허용됐다. 당시 높은 물가상승 률을 고려하면 장기 연부상환 자체가 특혜였다. 법과 관행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정경유착과 부패도 많았다.&nbsp;당시 적산기업 중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곳은 2%도 안 된 다. 적산 불하로 출발한 기업일지라도 두 세대가 넘도록 살아남았다면 끊임없는 노력을 인정해야 마땅하다. 끊임없이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 덕분에 소비자들로부터 선택받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 시각일 것이다. 바늘구멍 같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해당 기업들은 &#39;불굴의 승리자&#39;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nbsp;&#39;경제개발사는 정경유착사&#39;라는 편견&nbsp;1962년부터 본격화된 한국의 경제개발사 역시 특혜로 얼룩졌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특정기업에 사회적 자원을 몰아줬다는 주장이지만, 이 역시 과도한 지적이다.&nbsp;기적 같은 성공을 가능케 한 한국형 &#39;불균형 성장 전략&#39;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일방적 특혜가 아니라 국가적 요구에 적합한 기업을 전략적 관점에서 선발하고 사회적 자원을 집중하는 방식은어 느 시대에나 있었다. 문재인 정부도 5G나 반도체산업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고 관련 기업에 집중 지원했지만 아무도 이를 특혜 라 말하지 않는다.&nbsp;1960~1970년대 경제개발 현장을 지킨 황병태 전 의원의 증언 은 음미할 대목이 많다. 그는 수출입국의 임무를 떠맡은 상공부의 사무관으로 시작해 경제기획원 차관보까지 지낸 정통관료 출신이다. "외자업체를 선정할 때 오직 관심은 그 기업이 어떻게 성공을 거두고 얼마나 국가에 기여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전략적 고려뿐이었다. 금호그룹 창업자인 박인천 회장이 석유화학사업에 처음 참여하던 과정이나 유찬우 회장의 풍산금속을 방위산업체 로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또렷이 확인된다. 두 업체 모두 한국 대 표 재벌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당시 전략사업으로 선정되고 육성 되는 과정은 너무도 간단했다.&nbsp;사업적 판단 외에는 고려사항이 없었다. 그때 광주에서 운수업을 하던 박인천 회장이 기획원으로 실무과장 사무실을 방문해 석유화학사업 참여 의사를 밝혔고, 그에 따라 장기영 부총리를 거쳐 청와대의 의견을 물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39;실무과장이 검토해서 문제가 없다면 승인해주면 되지 않느냐&#39;는 한마디로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박 회장이 사업승인 을 받기까지 행정관청과 접촉한 것은 적어도내가이는사업 참여 상담 차 기획원을 방문한 것과, 서류를 제출하려고 상공부를 방문한 것 등 두 번이 전부였다.&nbsp;방산과 중화학공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던 초창기에 풍산 금속을 신동공장 사업주로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이 호소를 해가면서 유찬우 회장을 설득했다. 과장도 부총리도 설득 못 하자 직접 나섰다.&nbsp;이권에 초연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처신과 행동은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도 남을 일이다. 30년이 흘렀지만 개인적으로 재산과 이권에 연관됐다는 어떤 추문도 들어본 적이 없다. 박통 본인은 물론 주변 측근에 대해서도 철저히 지켜진 원칙이었다."&nbsp;황병태 전 의원의 기억에 다소의 미화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정경유착이라 부를 만한 일도 실제 많았다. 시대를 짓누른 일 상적 부패의 관행도 깊었다. 그렇지만 맨땅에 헤딩하듯 원시적 자본축적에 집중하는 속도전 과정에서 일정한 잡음은 나오기 마련이다. 부정적 측면만 부각해 경제개발 과정 전부를 특혜로 모 는 것은 균형 잡힌 시각이 아니다.&nbsp;부실기업에 세금이 투입되는 것도 특혜라기보다, 어느 나라에 서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해당 기업이 예뻐서 도, 봐주는 것도 아니다. 국가 경쟁력, 고용 유지, 경제시스템 붕 괴를 막기 위한 공동체의 판단으로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다. 반 대로 외환위기 때는 30대 재벌 중 대우, 쌍용, 해태, 진로 등 무려 17곳이 무더기 파산했다. &#39;자금지원 중단&#39;이 공동체의 이익에 부 합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nbsp;김화진 서울대 교수는 시장참여자를 &#39;적당히 나쁜 사람들 (moderately bad person)&#39;로 규정한다. 경제활동의 목적이 이윤창출 이고 생존경쟁을 수반하는 만큼 적당히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관점이다. 적당히 나쁜 사람들의 탐욕은 시장을 긴장시키고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제고한다. 시장의 룰을 훼손하지 않 는 한 &#39;적당히 나쁜 사람들&#39;은 경제적 측면에선 유능한 시장참여 자들이다.&nbsp;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누구나 타인에게 크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나쁜 행동을 한다. 때로 빨간불 에 교차로를 건넌다든지, 같이 누군가의 흉을 본다든지 하는 것 들이다. 하지만 상당수 사람들은 나쁜 일보다 선한 일을 더 많이 행하면서 살 만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정글 같은 경제현장에서 누군가에게 &#39;왜 당신은 천사가 아닌가&#39;라며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건 번지수 틀린 패자의 한탄에 불과하다.&nbsp;&#39;주류경제학은 부자만 위한다&#39;는 매도&nbsp;주류경제학은 부자와 강자의 경제학이라는 매도가 만만찮다. 이런 선동은 한&middot;미 FTA 반대운동에서 절정을 이뤘다. 당시 진보경제학자들은 무역 확대는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 간 격차를 확대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거대 자본을 앞세운 선진국이 개도국의부를 끊임없이 빼내간다며 &#39;자유무역은 선진국의 실업수출 대책&#39; 이라고 비난했다.&nbsp;이 같은 단순논법은 진보경제학이 거의 모든 경제적 문제를 재단하는 핵심프레임이다. 규제 완화에 반대할 때도 &#39;부자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 뿐&#39;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규제 완화는 누구 나 자유롭게 기업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뺏기는 격이라는 기적 의 논리를 펼친다. 인간을 시장에 맞출 것이 아니라 시장을 인간 에게 맞춰야 한다는 감성적 주장까지 끝이 없다.&nbsp;재벌을 위한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는 없다.&nbsp;경제학자의 핵심 관심은 국부 증진이다. 만약 어떤 학자가 재벌 과 부자에 유리한 정책을 제안한다면 그것이 사회 전체 후생과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향이어서지, 남다른 부자 편향 때문은 아니 다. 서민과 중소기업을 앞세우는 진보경제학이야말로 경제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약자를 희생자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39;착한 경제학&#39;이라는 미망과 &#39;착한 경제학자&#39;라는 감정과잉에 서 비롯된 감성적 정책의 후폭풍은 언제나 부자보다 빈자에게 치명적이다. 많이 내놓은 정부로 역사에 문재인 정부는 &#39;착한 정책&#39;을 가장 기록될지 모른다. 저소득 근로자를 위한다며 최저임금을 벼락같이 인상시켰고, 비정규직의 &#39;묻지마 정규직화&#39;를 밀어붙였다. 세입자를 보호하겠다며 전월세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 전월세&nbsp;고제를 담은 &#39;임대차3법&#39;도 통과시켰다. 결과는 기대와 달리 파괴적이었다. 최하위 계층은 아예 고용시장 바깥으로 쫓겨났고, 상위 귀족 근로자층 급여만 올랐다. 이는 지금 우리 경제가 겪고 있는 심각한 물가상승의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nbsp;&#39;로또 정규직&#39; 자리를 두고 노노 간 갈등이 폭발했고, 노동시장 선진입자들이 정규직을 싹쓸이한 탓에 청년 채용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전셋값이 5년 전 취임 때의 매맷값보다 높아지는 기막힌 현상에 &#39;벼락거지&#39;가 속출했다. 내 집 마련은 먼 달나라 일이 되고 말았다. 진보경제학이야말로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드는 선순환과 삶을 힘겹게 버텨온 빈자들의 희망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39;배신의 경제학&#39;이 아닐까.&nbsp;&#39;나랏돈 풀면 경제 좋아진다&#39;는 맹목&nbsp;나폴레옹(1769~1821)은 사법 &middot;군사&middot;행정 등 다방면에 탁월했지만, 경제에는 무지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불러모아 도랑을 파고, 그 도랑에 다시 흙을 메우는 의미 없는 일을 반복시켰다. 공공사업 이 실업자를 구제하고 경제에 활력을 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공공사업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커지자 프랑스는 나폴레옹 사후에 &#39;국립 작업장&#39;이라는 거대한 공공사업기관까지 설립했다. 정부가 앞장서서 돈을 풀면 경제가 활기를 찾을 것이라는 그 럴싸한 이 &#39;나폴레옹 경제학&#39;의 허상을 깨뜨리 이가 &#39;]]></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Tue, 04 Jun 2024 22:08:1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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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58</link>
			<description><![CDATA[&nbsp;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양승훈. 부키. 2024. 3. 28.&nbsp;울산은 우리나라 산업화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성공의 역사든 고난의 현재든 비단 울산만의 이야깃거리는 아니다.두번째로, 울산을 향한 질문은 결국 1970년대 형성해 놓은 중화학공업 위주의 수출주도산업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하는 불안을 담고 있다. 혁신이나 기술경제학 연구자들은 습관처럼 &#39;추격형 경제&#39;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39; 한국의 제조업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일본의 생산 하청기지로 출발해서 불하받은 부품과 완제품을 분해하고 결합하며 모방했고,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한 엔지니어들의 지도하에 도면을 베끼고 개선해 나가면서 성장했다. 더불어 노동자의 숙련도를 높이기보다는 독일이나 일본의 로봇이나 NC 선반 가공 같은 장비로 생산성을 높이면서 세계 최고의 제조업 생산성을 확보했다. 그 사이 유럽은 장비와 노동력이 노후화됐고 미국은 제조업을 등한시했으며 일본은 불황 속에서 설비투자의 여력이 없었다.한국은 산업화 이후 50년 동안 세계 5대 제조업 강국이 됐다. 대규모가공기계와 자동화 설비 투자를 통해 제조 선진국의 제품과 비슷한 품질로 더 싸고 빠르게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 &#39;메이드 인 코리아&#39;의 초기 전략이었다. 흔히 조선, 자동차, 종합기계 등 기계산업이 발전했던 방식인 &#39;조립형 공업화&#39;라 부르는 유형이다. 이러한 산업화와 수출주도 전략 아래 수혜를 받았던 도시가 울산이다. 바로 조선과 자동차가 그렇다. 해외의 플랜트 설비를 그대로 이식해 정유와 석유화학 제품을 만들어 냈던 남구의 산업도 크게 보면 차이가 없다. 울산의자본의 이해관계에 울산이 부합했기 때문에 기업가가 울산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 &#39;다른 무엇&#39;을 보통 정치와 경제의 연즉 정경유착으로 생각하기 쉽다. 한편으로는 수긍할 만한 주장이나 좀 더 넓게 보면 지역 사회나 초국적 기업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관계망(네트워크)을 고려해야 할 때도 있다. 입지를 넘어선 그 무엇으로 커넥션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 이후 쿠데타 세력이 처음 했던 일 중 하나가 기업인을 부정 축재자 명목으로 가둔 것이다. 당시 삼성 이병철, 삼양사 김연수 등 부정축재자로 몰린 많은 기업인은 군사정권 초기부정 축재의 죄를 경감받을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그들은 &#39;경제재건촉진회&#39;를 창립했다. 이들의 대책이 바로 공장 헌납이었다. 자신 들이 기업을 경영하면서 형성한 노하우 혹은 암묵지 tacit knowledge를 통해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여 경제개발에 기여한다는 논리였다. 자금은 기업인이 외자를 유치하고 정부가 내자를 동원하는 것으로 협상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경제재건촉진회 이병철과 대한조선공사 남궁련사장 등은 1961년 11월 2일 미국과 유럽으로 외자 유치를 위해 66일간의 출장을 갔다. 돌아온 경제재건촉진회는 대규모 공업센터를 짓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39;&#39; "이병철은 세계적 규모의 비료 공장을, 남궁련은 정유공장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이었다."&nbsp;이들 기업인은 각각 울산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남궁련은 1958년 일제가 짓다 만 울산 정유 공장 복구 사업에 진출한 적이 있 었다. 김연수는 1954년 울산에 제당 공장을, 1957년에는 자연 한천&nbsp;및 인조 얼음 공장을 준공했다. 인조 얼음 공장은 1962년 당시 160여 명의 노동자가 근무할 정도여서 울산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장병익, 해석할 2007:33).15이 과정에서 남궁련이 울산 정유 공장 복구 사업을 하면서&nbsp;일본 병참기지화 계획안을 박정희 의장에게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이러한 재벌의 행위를 종합하면, 재벌 사업가의 이해관계에 울 산이 부합했기 때문에 기업가들이 추천했다는 논리가 된다.&nbsp;그러나 재벌 기업가가 구상을 밝히더라도 결국엔 국가의 발전 계 획과 연동돼야 하므로 정부 승인이 필요하다. 일단 짧은 시간에 성과 를 내서 보여 줘야 하는 쿠데타 정부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실제 진행 속도를 봐도 그렇다. 1962년 1월 4일 울산공업센터 지정 가능성 에 대한 토의와 조사단이 결성되고 나서 3일 후인 7일부터 14일까지 바로 현지 조사가 이루어진다. 1 월 10일에는 &#39;경제재건촉진회&#39;를 모태로 탄생한 한국경제인협회가 울산을 공업센터로 지정해 달라는 건의 를 했고, 13일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발표된다. 그리고 25일 에 울산특정공업지구 의결주문이 따르고 27일에 울산특정공업지구가 결정되어 31일에 공포된다. 2월 3일에 기공식이 거행되고, 2월 7일 에는 정부의 울산개발위원회 울산개발계획본부가, 3월 7일에는 울산 특별건설국이 설치된다. 두 달 만에 전국에서 가장 큰 공업센터가 구 축된 것이다. 그 계획과 결정까지 단 한 달이 걸렸다(한삼건, 2016:19)&nbsp;이런 속도전에서 국가의 리더십이나 관료의 역량을 생각해 보는 일은 자연스럽다. 우선 군사정부의 리더 박정희의 개인적 결단력을 떠 올릴 수 있겠다. 쿠데타를 일으킨 배짱으로 명운을 건 승부를 했다고&nbsp;과중동 건설공사에서 역경을 이겨 낸 입지전적 활약상은 인구에 회자 되고 위인전에까지 기록됐다.산업도시 울산의 관점에서 현대를 다루기 위해서는 2개의 산업즉조선 해양 플랜트를 만드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의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현대중공업의 역사와 성공 요인우선 현대중공업부터 보자. 널리 알려진 대로 간략히 요약하자면,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던 박정희가 정주영에게 조선업을 시작해 볼것을 권유(혹은 압박)하자 자본도 기술도 없던 정주영이 전 세계를 헤매다가 그리스 리바노스사의 유조선 2척을 수주하고, 그 수주 계약서를 가지고 영국 바클레이 Barclay 은행에서 차관을 받아 조선소 부지를 조성하면서 동시에 선박을 건조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선박 수주는 19701년 12월, 조선소 부지 조성 사업은 1971년 4월, 조선소 기공식은 1972년 3월이었다. 1973년 3월 선박 건조가 시작됐는데 1974년에야 1~2 도크가 완공됐다. 일정에 맞추기 위해 도크 완성 전에 탑재할 블록을 동시에 맨바닥yard에서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배를 지을 생산직 인력도 선박 건조가 시작되는 시점에 훈련원 1기생이 간신히 수료함으로써 준비가 됐다. 병행 혹은 병렬 parallel 공정으로 조선소 건설, 선박 건조, 건조 인력 양성을 한 번에 해낸 것이다. 그리고 1년 8개월 만인 1974년11월에 첫 번째 선박을 선주에게 인도했다. 선박 건조 경험이 없는 현 대가 순식간에 글로벌 시장에서 최상위권 조선사로 자리 잡았다.정주영의 표현에 따르면 건설업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이 조선업을 일구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nbsp;제가 조선소를 짓겠다고 하자 회사 내에서도 "우리가 무슨 경험이 있 다고 조선소를 만드느냐"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조선업이라는 것이 철판으로 큰 덩치의 탱크를 만 들어 바다 위에 띄우고 중력에 의한 추진력으로 달리는 것밖에 더 있느냐 고 생각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조선업에 대한 경험은 없지만 발전소&nbsp;나 정유 공장 등을 많이 해 봐서 어떤 형태든 철판에 대한 설계나 용접은 자신이 있고 내연기관을 장착시키는 일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를 큰 탱크로 보고 그 탱크 속에 엔진을 붙이면 된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정유 공장을 세울 때처럼 탱크를 도면대로 구부려서 용접을&nbsp;하면 되고, 속의 기계도 우리가 건물을 지을 때 냉온방 장치 다 따로 넣듯 이 선박의 기계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해서 끼우면 된다는 발상으로 조 선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조선업자는 이런 발상을 하지 못할 것입니 다. 건설업자니까 그렇게 아주 쉽게 생각을 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 리는 그동안 산업 플랜트를 하면서 많은 기술을 습득했고 기계, 강전, 약 전 등 어떤 계통이든지 각급 기술자가 다 있었기 때문에 선박이 아무리 어 렵다 하더라도 다 해낼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덩치가 크다고 해 서 제조라는 말 대신 건조shipbuilding 라고 하는 것이지 사실 만드는 모든 과 정은 건축과 비슷한 것입니다. (정주영, 1997:28-29)1980년대부터 울산 현대조선소는 수주량이나 건조량에서 세계 1위 조선소의 위치를 점하는 해가 늘었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부인 로 배를 가격 경할 수 없는 세계 1 위 조선소가 됐다.&nbsp;이러한 현대중공업의 성공 요인을 보는 세가지 시각이 있다. 먼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 공업화 정책 즉 테크노크라트(기술관 에 없)의 혜안 때문이라는 시각이다. 상공부 장관 오원철로 대표되는 테 크노크라트가 철강,조선, 비철금속, 기계, 전자, 화학 공업이라는 &#39;미래&nbsp;다는 먹거리&#39;를 잘 설정하고, 정책 금융을 통해 저리 대출 및 해외 차관을 육성했기 때문에 그중 한 산업을 담당했던 현대가 조선업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발전국가의 시각은 산업을 운영했던 일련의 환경 중 아주 협소한 &#39;배경&#39;만을 설명한다. 일단 국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바라봤던 조선업의 상태, 국제적으로 얽혀 있는 선박 및 해운 시장의 행위자들을 제외한다는 문제가 있다.&nbsp;국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유 공장 건설에 이어서 조선소 건조에 서도 난항에 빠져 있던 정주영에게 해운 업계의 다양한 사람을 연결해 주었던 밴 플리트 같은 인물이 그렇다.20 국내적 관점에서도 문제다.조 선업을 정주영이 처음 시작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60년 대 국내의 가장 큰 조선소는 국영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였다. 앞서 비료 공장 이야기에도 등장하던 남궁련이 바로 대한조선공사 경영 인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조선공사는 내수용 선박을 짓던 회사였고,&nbsp;기술력 부족으로 수출용 선박을 건조하지 못했다. 대한조선공사는 내 수용 선박 위주임에도 경영 상태가 좋지 못했다.국내 해운사로&nbsp;배를 짓기보다는 일본 등에서 매각하는 중고 선박을 구매하려고 해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국영기업이기 때문에 도산 하지는 않았으나 경영 위기가 올 때마다 정부의 공적 자금을 받을 수밖 에 없었으니 정부 관점에서는 골칫덩이였다. 박정희 정부에서 재정과 경제기획을 추진하던 경제기획원은 경영 상태를 개선하지 못하는 대&nbsp;한조선공사의 사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출을 위한 조선소를 짓겠다는 발상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달리 말해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으 로 현대중공업을 일궜다는 첫 번째 시각만으로 전체 그림을 그리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다.&nbsp;두 번째 시각은 정주영이라는 불세출의 산업 자본가를 위시한 현대그룹의 공이라는 해석이다. 차관을 따내기 위해 영국에 찾아가 바클 레이 은행장앞에서 동전에 새겨진 거북선을 보여 주며 기술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준다거나, 선박 건조 과정을 건설과 비슷하게 파악해 공 법을 단순화하고 건설업에서 얻은 통찰을 조선 공법에도 반영할 수 있 도록 했다는 예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영자나 현대그룹의 공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도 많다.&nbsp;애초 현대조선소의 초대 조선 소장은 덴마크 오덴세 조선소 출신 의 엔지니어였다. 1970년대 당시 덴마크 조선소는 기본설계&rarr;상세 설계 &rarr; 생산설계로 이어지는 단계 중 처음 선박의 구상 단계인 기본설 계와 구역을 나누는 상세설계에 강점이 있었고, 실제 작업자들에게 필 요한 도면을 그려 내는 생산설계는 잘 수행하지 못했다. 덴마크 조선 소는 후행 설계부터 최종 건조까지의 과정을 큰 단위로는 관리할 수 있었으나, 일본처럼 미세 작업 관리를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정주영㊽ 기본설계와 상세설계 도면을 유럽에서 사오고 그 뒤의 과정은 기존끼 안해 낸 엔지니어들 영업 꼭 필요한 발판도&nbsp;건설업에서 했던 공법을 도면의 주인인 유럽의 공정 전문가를에 적용하면 다 될 줄 알았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결국 선박 건조의 새 하여 작업했던 노 엔지 폭발적으로 늘어&nbsp;밀한 부분을 배우기 위해 처음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로 이들이 현대중공&nbsp;니어 인력을 파견 보내 교육시키고22,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의 공법을 배우고 &#39;베껴 오는 방식으로 조선 기술의 수준을 높였다(박기주 외, 2014:432-433)&nbsp;다음으로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행착오를 어떠한 방식으로푸 하 선 건조를 는지를 살펴보자. 장기 관점에서는 국가가 지원금을 주고 기업이 책임 질 모두를 들 지고 양성하는 &#39;직업훈련소&#39;라는 제도적 쟁점과 맞닿고, 단기 관점에 현대자 서는 기지를 통해 난관을 돌파했던 현장의 엔지니어와 노동자의 &#39;기민 현대 함&#39;에 대해 예찬하게 된다. 더불어 리바노스에서 수주한 첫 번째 유조 화학 공선 건조 과정에서 노동자 수십 명이 중대 재해를 입어 목숨을 잃게 되 는데, 많은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배제하고서 현대중공업의 성공을 설&nbsp;명할 수는 없다.&nbsp;여기서 현대중공업의 성공을 보는 세 번째 시각이 도출된다. 즉 중 공업 안팎의 여러 사람이 이루어 낸 성공이라는 견해다. 이역만리 스코틀랜드까지 찾아가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혀 오고, 일본에 건너가 전 호 도면 작성법과 설계 기술을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일본인 엔지니어들 에게 묻고 되묻고 다시 확인한 이들의 공로다. 유럽식과 일본식 선박 건조 기술을 혼합해서 그 나름의 현대중공업 스타일의 건조 기술로 창안해 낸 엔지니어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뜻이다. 또 고소(높은 곳) 작업 에 꼭 필요한 발판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현장에서 밧줄에 몸을 의지 하여 작업했던 노동자들의 헌신도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인구는&nbsp;폭발적으로 늘어나 일할 곳을 찾아야만 했던 1970~1990년대의 젊은&nbsp;이들이 현대중공업의 성공을 일궈 낸또 하나의 힘이었다. 현대중공업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1980년대를 지나며 선박 생산 설계를 넘어 상세설계와 기본설계를 자체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 었고, 엔진 등 주요 부품과 장비를 국산화해 냈다. 1990년대 후반LNG&nbsp;선 건조를 해낼 당시에는 90퍼센트가 넘는 국산화와 원가 절감, 고품 질 모두를 달성해 내서 세계 최고 조선소가 됐다.&nbsp;현대자동차의 성공 요인&nbsp;현대자동차의 성공도 같은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편에는 중 화학 공업화와 국산차 개발에 대한 정책의 지원이 있었다. 다른 한편 에는 정주영이 해방 직후 정비소 시절부터 간직해 온 자동차 산업에 진 출하려는 집념이 있었고, 정세영의 내연기관 엔진 국산화에 대한 신념 이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현장에서 어떻게 해서든 기술적 혹은 공학적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 애썼던 작업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현 대자동차 공장을 살펴보던 외국인 엔지니어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nbsp;기계가 고장 났다고 해서 나와 팀이 되어 늘 함께 다니는 정비공과 같한국은 제조업으로 지탱되는 국가다. 국가 이미지나 숫자로도 바 로 드러난다. OECD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은 국민총생산 (GDP)의 27.1퍼센트를 제조업을 통해 벌었는데, 한국보다GDP 중 제 조업 비중이 높은 국가는 아일랜드(36.6퍼센트)밖에 없다. 고용 면에서&nbsp;보면그 특징이 더 도드라진다.&#39; 세계은행의 산업별 고용률 자료를 참고해 보면,2019년 기준 한국은 총 고용에서 제조업이 25퍼센트를 담 당한다.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으로 OECD 국가 중에서 한국보다&nbsp;제조업 고용 비중이 더 높은 나라는 독일(27퍼센트)이나 이탈리아(26퍼 &bull;기간 동안 방역에서 선방해 공장 가동을 멈추지 않았던 한국의 제조업 센트) 정도다. 코로나19로 인해 세계 경제가 움츠러든 2020~2021년 비중은 GDP로 보든 고용으로 보든 더 높아질 수도 있다.제조업 국가 대한민국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이나 분당, 일산 같은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공장이 어디에 있냐고 물을 &bull;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지천이 공업 지대다.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수원, 평택으로 시작하는 산업 벨트가 나온다. 수도권의 상습 정체 구간으로 악명 높은 서부간선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독산, 소하, 시흥, 안양 모두가 공단 지역이다. 4호선도 시철도를 타고 남쪽으로 평촌만 지나면 곧 군포산업단지나 안산의 반 월국가산업단지까지 공단 지대가 펼쳐진다.&nbsp;1호선 경인선을 탄다면?서울만 빠져나가면 부천에 거대한 산단이 있고, 인천에 도착하면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길에 쏟아져 나오는 남동공단과 부평 GM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당장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던 상황을 생각해 보자.2020년 3~4월에 잠시 벌어졌던 KF 94, KF 80, KF AD 등 마스크 부족 상황이 있었다. 이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삼성전자 스마트공장 지원 센터의 엔지니어들이 마스크 제조 업체의 생산설비를 점검해서 최적화했고, 곧 생산 물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공급 부족을 해소했다.대기업의 생산기술 노하우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실제로 울산에서는 공장장 이상 기술 임원들의 퇴직자 모임인 NCNNew Challenge Network이 2008년에 출범해 중소기업과 제조 스타트업 등에 기수기이]]></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Tue, 04 Jun 2024 20:14:1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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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또 하나의 가족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기록.</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57</link>
			<description><![CDATA[또 하나의 가족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기록. 이래호. 청미디어. 2023. 2. 15.&nbsp;비료공장 설립과 4.19규모가 큰 기업을 여러개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기업 집단, 그룹 또는 재벌기업이라고 한다. 재벌이라는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 경제를 지배하던 대기업을 집단으로 지칭하는 표현이다.&nbsp;한국은 해방과 한국 전쟁의 과도기를 거쳐 1950년대 중반까지 국가가 소유나 권한을 가지고 있던 국유재산, 귀속재산, 원조물자 배정, 정부발족 사업 등을 민간기업에 이양하였다. 이때 그 분야에 관련있 는 회사나 자본, 경영 능력이 되는 회사가 참여하여 불하받은 후 막대한 이익을 창출한 기업가의 집단을 재벌이라고 하였다.정치와 경제가 유착하여 비정상으로 이루어진 형태로 보는 시각도 많았다. 국가는 경제정책을 통하여 국민 복리를 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기에 1961년 5.16 이후 한국 사회는 삼성을 비롯 삼호 개통, 대표 그룹 등 많은 기업가 집단인 재벌이 탄생되었다.이병철은 사업의 구상, 분석, 경청, 기획, 실행, 완성 등의 단계별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 분야에 하늘이 준 남다른 재능과 감각을 갖고 있었다. 자료 수집과 분석 그리고 학습 과정도 중요시 하였지만 이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전문가 의견을 듣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병철의 &#39;경청론&#39;이다. 전문가란 말 그대로 그 분야의 남다른 식견과 지식을 가진 전문인이기에 이병철은 전문가의 의견을 자주 듣는 것을 중요시하였다.1) 의령에서부터 꿈꾸던 비료공장1936년 이병철은 아버지로부터 쌀 300석(섬)을 수확하는 규모의 농토를 받아 사업 밑천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사업이 번창했다.&nbsp;이병철은 &ldquo;농업으로 경제 1960년 이병철은 한국 사회에 필요한 비료 공장를 일으키고, 농업으로 농촌과 설립 계획을 수립하였다. 농민을 위한 일을 하자. 그것은 비료 공장을 한국에 설치하여 우리 손으로 비료를 생산하는 것이다. 자급자족만이 우리 농촌의 가장 시급한 문제 해결의 하나이다"라고 생각하였다.당시 비료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고, 원조 자금에 의한 수입 품목 중 가장 많은 금액을 차지하였다. 1955년에 착공된 충주비료 공장, 1958년에 착공된 나주비료 공장 등이 있었지만 이 두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량으로는 한국 농촌 비료 사용의 1/10의 규모 밖에 감당할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빈곤에서 벗어나고 부정 부 룹 경영에 패를 추방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정부는 5월 29일 한국을 대표하는 경 하였던 일 제인 11명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시키는 등 초긴장의 정치 분위기가 이 책에 되었다. 이 시기 이병철이 일본에 있어 귀국을 하지 않자 국내에서는&nbsp;부정축재 혐의가 수습되지 않았다.&nbsp;박태준 은 경제 재건의 필요성을 인식한 군사정부는 이병철에게 여러 가지 신 국가대표 변 약속을 하고 귀국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1961년 6월 26일 이병철 을 하는 것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포공항에 도착 하자마자 비행기 안까 할 수 있도 지 관계자가 들어와 이병철을 명동에 있는 메트로호텔로 데리고 갔 오늘날 포 다. 다음날 관계자의 안내로 지금의 원호처 청사가 있는 참의원 건물 50대 이 내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실 부속실로 안내되었다.&nbsp;박태준은 훗날 포항제철 회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다. 박태준의 회 고록에 나온 이병철과의 첫 만남 내용이다. "부정축재 혐의로 몰려 일 본에서 귀국 시기를 조절하면서 기다렸다는 분이 그런 정황과는 반대 로 무슨 훈장을 받으러 온 듯 의연하고 당당했다. ... 경제를 발전시켜 국가와 국민을 구하겠다는 혁명이 기업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돈 버는 기업인을 죄인 취급하면 국민에게 일시적으로 환심을 살 수 있으나 경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서슬 퍼런 국가 최고 권력자 앞에서 누구도 섣불리 꺼낼 수 없는 말을 하였다."&nbsp;이병철과 박태준 두 사람은 일본 와세다대학교 중퇴라는 이력도 가 지고 있다. 이날 인연으로 훗날 이병철은 박태준을 자주 불러 삼성그룹 경영에 대한 의견도 묻고, 삼성중공업을 직접 관리해 보라고 제안 하였던 일화도 있다.&nbsp;이 책에는 중석불 달러사건, 거평그룹의 대한중석 인수 등의 내용을 앞서 소개하였다. 박태준 회고록에도 대한중석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nbsp;박태준은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을 하였다. 박태준은 축구 국가대표 선수가 재정의 어려움으로 시합이 없는 시기에 광산에서 일 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계자에게 지시하여 운동선수는 운동만 할 수 있도록 정상적인 대한중석 축구단을 운영하도록 지시하였다.&nbsp;오늘날 포스코 축구단의 원조가 되었다.&nbsp;50대 이상이면 군대 생활 중 전투화 광을 내는데 필수였던 말표 구두약을 기억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군납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1966 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복싱선수 김기수와 이탈리아 니노 벤베 또&nbsp;새로운 돌파구들&nbsp;이병철은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의 환경이 변함에 따라 전자 관 에 설립 련 소비재 품목의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측하였다. 전자 공업을 선택 시작하 한 이병철은 1969년 백색가전과 음향기기를 생산하는 삼성전자공업 화학과 주식회사를, 12월에는 흑백 TV와 라디오 수상기를 제조 생산하는 삼 * 하 전기회사를 차례로 설립하였다.&nbsp;삼성전관의 당시 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대형 기업은 금성사와 대한전선이 중심 공업 자본력이 큰 삼성이 전자 사업에 뛰어들자 전자 제품 생산업 이었다.&nbsp;계는 과잉생산으로 인한 여러 문제점을 제기하며 삼성전자 허가 반대 여론을 형성하였다. 언론사도 과잉생산으로 인한 부작용이 크다며 정부의 허가에 부정적이었다.&nbsp;삼성전자의 가전제품 진출은 사돈 관계인 금성사 구인회 회장과의 관계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삼성전자는 생산품 중 일부만 국내 에 공급하고 나머지는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사업 허가를 받았다.&nbsp;(LG는) 1972년 내수용 흑백 TV를 생산하고 1974년에는 세탁기, 냉장고를 생산하였다. 1974년에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반도체 사업에 한 걸음 다가갔다. 1977년에는 컬러 TV를 생산하였다.&nbsp;무너진 삼성의 자존심 그리고 변화 1979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재계 순위를 발표하였다. 또&nbsp;한국 재계 순위가 형성될 때부터 1위 자리를 지키던 삼성그룹이 현 하나의&nbsp;대그룹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호남석유 등 대형 가족 중공업에 진출한 럭키그룹이 2위로 도약하고 삼성그룹은 3위로 발표됐다.&nbsp;이병철은 명예와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변화가 필요하였 다. 큰 결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위기를 느꼈다. 이병철은 새로운 첨단산업을 찾기로 하였다.&nbsp;그렇다면 이병철에게 첨단산업 기술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것 은 &#39;반도체&#39;였다. 이병철은 "면적이 작고 지하자원도 풍부하지 않은 한 국은 오직 제조와 수출주도 품목의 생산만이 한국경제의 버팀목이 된 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은 과감한 산업재편을 하여야 하고 첨단산 업 기술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늘 머릿속에 생각을 가&nbsp;지고 있었다.&nbsp;1980년 봄, 이병철은 일본의 저명한 경제 전문가 이나바히데조 박 사로부터 반도체 생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요 내용은 앞으로 살 길은 반도체, 컴퓨터, 유전공학, 우주해양공학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라 하였다. 마음속 깊게 새겨 두었다. 1981년 9월, 이병철은 그룹&nbsp;임원회의에서 삼성의 장래에 관해 자신의 견해와 경영관을 밝혔다.&nbsp;"앞으로 첨단산업 기술인 반도체와 컴퓨터에 삼성의 흥망을 걸겠다.&nbsp;이병철은 반도체를 알기 위해 공부도 많이 하였다.1982년, 18년 만에 미국을 방문하였다. 미국 주요 산업 도시와 [BM, GE, HP 등 여러 전자 업체의 현장을 직접 보았다. 국내에서도 전자 산업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일본과 미국 에서 나온 컴퓨터에 관한 자료는 구할 수 있을 만큼 구해서 읽었다.반도체를 이해하고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려고 구상을 하니 풀어나가야 할 과제도 많았다. 반도체는 워낙 세밀한 산업이다 보니 기술 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고 막대한 자원이 투자되어야 했다. 더구나기술 개발 속도가 무척 빨라 제품의 사이클이 짧은 것도 문제였다.이병철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만약 반도체 사업을 한다면, 고급 두뇌는 어디서 데려올 것이며, 데려오지 못할 경우 어떻게 육성해야 하는 것일까? 또 공장 부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그 건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공장 설비에 드는 천문학적인 돈을 어떻게 조달해야 하는 것일까?&nbsp;이병철만이 가진 메모 경영과 경청 경영을 작동시켰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1983년 2월 6일, 이병철은 도쿄의 오쿠라호텔 505호실에서 메모지에 밑줄을 하나하나 그어가고 있었다. 이병철이 반도체 사업을 결심하게 한 것은 단 세줄의 통계에 의한 것이었다. &#39;철강은 톤당 340달러, 석탄은 40달러, 알루미늄은 3,400달러, 텔레비전은 21,300달러의 부가가치가 있다. 그런데 반도체는 85억달러, 소프트웨어는 톤당426억달러의 부가가치가 있다.&#39; 결심이 섰다. 반도체 관련 계획서를 만들도록 지시를 하였다. 그리고 1983년 3월 15일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Tue, 04 Jun 2024 20:01:4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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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대한민국 돈의 역사. 홍춘욱</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45</link>
			<description><![CDATA[대한민국 돈의 역사. 홍춘욱. 상상스퀘어. 2023. 7. 17.&nbsp;미국 정부는 이승만 정부에게 투명한 원조 자금의 관리와 일 본과의 교역 확대를 권고했지만, 두 가지 모두 실현되지 않았다.&nbsp;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및 무역 거래는 이승만 정부가 직을 걸고 반대했던 데다, 현물로 지급되는 각종 물자는 이승만 정부의 정치자금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은 이승만 정부가 비밀리에 비료업자와 결탁하여 농민에게 비료를 비싼 가격에 판매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26 이승만 정부는 미국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비료의 상당 부분을 정부 보관 창고에서 몰래 개인 비료업자에게 빼돌리고, 이를 다시 농민에게 높은가격에 판매하면서 수입을 챙겼던 것이다. 또한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비료 판매를 제한하면서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높은 가격의 비료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판매하는 값싼비료를 구입하기 위해서 기다렸다가 비료를 사용할 시기를 놓치 는 농민들이 허다했다.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농민의 불만까지 높아지자, 이승만 정부로서도 대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이승만 정부가 꺼내든 카드는 바로 적산 매각이었다. 적산은 조선총독부와 일본인이 보유한 토지와 기업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가운데 토지는 미군정이 1947년에 매각했으니, 남은 것은 기업체였다.&nbsp;적산 기업은 노동자의 숫자나 생산액을 기준으로 볼 때 경제 전체의 1/3~1/2에 이르는 막대한 수준이었다.&nbsp;적산 기업을 민간에게 매각하는 법(귀속 재산 처리법)이 1949 년 12월에 제정되었지만, 곧바로 한국 전쟁이 터져 본격적인 매&nbsp;각은 한국 전쟁 이후로 미뤄졌다. 1954년부터 이승만 정부는 군 수 물자 공급을 늘리고 재정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적극적인 매 각에 나섰다. 1958년 5월까지 총 263,774건의 적산이 매각되어 90% 이상 처리가 완료되었다.27 귀속 업체는 생산 시설이 좋 은 대규모 기업이 대부분이었고, 대한석탄공사와 대한조선공사 등 일부 기업만 매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인&nbsp;그러나 한국 전쟁 직후에 적산 매각이 이뤄졌기에 매우 저렴 하게 매각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조선방직 부산 공장의 경우, 정부가 평가한 가격은 35억 원이었으나 실제 매각액은 22억 원&nbsp;에 불과하였다.28 삼척 시멘트 공장의 경우 감정가가 7억 원임에 도 판매가는 4억 5,000만 원에 그쳤다. 귀속 사업체의 매각 가격 은 책정 가격에 비해 평균 62% 수준이었다. 더 나아가 15년 동 안 분할 납부하게 되어 있었고, 이마저도 은행의 특혜 대출을 받&nbsp;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흥은행 등 당시 5대 시중 은행의 대출에서 1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953년 1~5% 수준에서&nbsp;1960년 10~30% 수준으로 높아졌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nbsp;특히 한국 전쟁 이후 물가가 수십 배 상승하는 동안 15년에&nbsp;걸쳐 매각 대금을 갚았기에, 귀속 재산을 매수한 이들은 엄청난&nbsp;차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적산 매각은 정경 유착과 부 패의 온상으로 여론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적산 매각이 한국 경제의 성장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nbsp;왜냐하면 이때를 고비로 제조업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기 때 문이다. 제일 먼저 성장 궤도에 올라탄 것은 이른바 &#39;3백 산업(밀 가루, 설탕, 방직) &#39;으로 식료품은 연 15.7%, 방직은 10.9%의 연평 균 성장률을 기록했다.적산 매각이 경제 성장으로 연결된 이유는 산업 자본의 형성 에서 찾을 수 있다. 아무리 헐값이라 해도 적산을 매입할 돈을 지닌 계층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더 나아가 전쟁이 막 끝나 미래 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거액을 투자했다는 것은 그 만큼 야성적 충동&#39;을 지닌 인물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야성적 충 동은 기업가들이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투자하 고 또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나서는 것을 지칭한다. 자산을 일구 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 돈을 잘 운용할 것인지에 집중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은 더 빠른 성 장을 위해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또 모험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 인다.&nbsp;물론 가족들 입장에서는 가장의 이런 행동이 매우 불안하 게 보이겠지만, 나라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야성적 충동을 지닌 기업들을 육성하고 또 보호해 주어야 한다. 기업이 성장해야 고 용이 늘어날 것이며, 생산성도 향상되어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 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nbsp;그러나 적극성을 지닌 기업가만으로 경제가 성장할 수는 없 다. 물건을 사줄 고객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쓸 모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구매자이자 원재 료 공급자로 나선 것이 정부였다. 먼저 구매자로서 한국 정부는 적산 매각 자금과 해외 원조 덕분에 적극적인 재정 집행이 가능 했다. 1953~1960년 동안 한국 정부는 수입의 72.5%를 원조에&nbsp;의존했는데, 특히 미국의 원조로 제공되는 물건을 국내에 판매&nbsp;하여 얻은 수입이 약 70%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31&nbsp;정부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핵심 원재료의 공급에서도 큰 역&nbsp;할을 담당했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 정부는 이른바 &#39;잉여 농산물&#39;을 원조해, 그 규모가 1억 6,425만 달러에 달했으며,&nbsp;이 가운데 밀이 40%, 원면이 11.1%를 차지하고 있었다.32 이 덕 분에 3백 산업을 비롯한 내수 기업들의 성과가 크게 개선되었 으며, 1950년대 후반 방직 공업은 공급 과잉의 조짐마저 나타났 다.&nbsp;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수출로 돌아서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이 수출에 동의하지 않 았다는 점이다. 미국은 원조를 통해 공급된 원면으로 생산된 제 품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이승만 정부가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적정 수준보다 낮게 유지한 것도 수출의 어려움을 높이는 요인으로&nbsp; 작용했다.&nbsp;이승만 정부는 1950년대 중반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1대 500으로 책정했는데, 미국인 경제 고문들이 바람직한 환율은 1 대 1,000이라고 여러 차례 조언했음에도 이를 수정하지 않았다&nbsp;(1962년 화폐 개혁으로 10환이 1원이 되었기에, 1달러=100원으로 볼 수 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의 경제 고문 크롱크Edwin Cronk는 한국 정부가 이처럼 원화의 가치를 높게 유지했기 때문에 "수출은 오 히려 손해였다."라며, 당시의 환율로는 수출업자들이 "인건비나&nbsp;원재료비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라고 평가했다.&nbsp;여기에 부응해 한국 정부 역시 이전처럼 차관 인가를 남발하고 일본 정부에 승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일본이 제시한 연간 한도에 맞 춰 차관 우선순위 사업을 선별해 일본 정부와 사전에 교섭하기 로 했다. 신규 2억 달러 차관 사업마저 배정이 완료되자 1970년&nbsp;제4차 한일 정기 각료 회담에서는 매년 연간 6,000만 달러 선에 맞춰 프로젝트별로 상의하여 상업 차관을 추가 공여키로 합의했 다.이와 같은 대규모 차관 도입이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기는&nbsp;했지만,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가장 큰 문제는 "좋은 투자 프로 젝트가 넘쳐나느냐?"이다. 앞의 사례에서 기업가 A는 연간 20%&nbsp;의 수익을 예상하는 사업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기&nbsp;업가 B가 가진 프로젝트는 연 수익률이 10%에 불과하고 수익 의 신뢰성도 높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저금리의 차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부실 위험이 존재한다. 특히 1969년을 전후해 베트남 전쟁에서 &#39;미국 패전&#39;의 가능성이 높아 진 것이 위험을 더욱 부추겼다. 1968년 베트남 파병 미군은 54.8 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1969년에는 47.6만 명으로 줄어들었&nbsp;고, 1970년에는 34.5만 명 그리고 1972년에는 3만 명으로 급감&nbsp;했다.89 따라서 한국군 파병 규모도 1968년 5만 명에서 1972년 에는 3.7만 명으로 줄어들고, 베트남 호황도 막을 내리게 된다.&nbsp;돈을 많이 빌려 공격적으로 투자했는데 경기가 나빠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업의 수익성이 악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매출액&nbsp;에서 차지하는 이자 등 각종 금융 비용 부담이 폭발적으로 상승할&nbsp;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저금리의 차관을 제때 받을 수 없는 상황에&nbsp;서 기업들이 담보 없이 신속하게 돈을 빌릴 수 있는 사채에 외지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의 1971년 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90% 이상이 월평균 4% 정도의 금리로 사채를 이용하고 있었다. 일본 상사의 공격적인 대출 주선 그리고 기업들의 지나친 낙 관이 한데 어울려 대규모 기업 부실 사태를 낳은 셈이다.&nbsp;대비 금융 비용이 10% 선까지 치솟는 상황에서 부실기업 문제가 부각되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39;8.3 사채 동결 조치&#39;를 취하&nbsp;기에 이르렀는데, 핵심 내용은 아래와 같다.91&nbsp;첫째, 1972년 8월 2일 현재,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사채를 일주일 내에 전부 신고하는 한편 사채의 이자율을 은행 금리 수준 (연 16.2%) 으로 인하하고 원금은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한다. [중략]&nbsp;둘째, 은행 등 금융 기관이 기업에 대출한 자금 중 단기성 대출 금의 30%를 장기 저리 자금으로 대환한다. [중략]&nbsp;셋째, 은행을 이용할 수 없었던 저신용/무담보의 중소 상공업 자 및 농림&middot;수산업자를 위해 신용 보증 제도를 마련한다. [중 략]&nbsp;넷째, 산업 합리화를 위한 자금 500억 원을 조성하여 산업 합 리화 기준에 맞는 기업에 장기 저리로 대출한다.&nbsp;1997년에 발생했던 외환 위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주장 이 있지만, 필자는 1972년의 사채 동결 조치가 가장 중요한 배 경에 있다고 판단한다. 연이율 40% 이상의 사채를 은행 대출 금 리 수준(16.2%)으로 인하하고 3년 동안 갚지 않아도 되며 이후 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특혜였고, 이는 한국 기업들이 부채에 의지한 &#39;브레이크 없는&#39; 성장 전략을 더욱 강하&nbsp;게 추종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8.3 조치 이후 기업들&nbsp;의 경영 실적은 크게 개선된 반면, 금융 비용 부담률은 5% 아래&nbsp;로 떨어졌다.&nbsp;그러나 기업들의 반대편, 즉 가계와 자산가들의 입장에서는&nbsp;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 없었다. 은행 이자율이 인플레이션&nbsp;수준보다도 낮은 상황에서 예금자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기보다&nbsp;사채 시장에서 운용하는 게 훨씬 이익이었다. 특히 자본 시장의&nbsp;발달이 미약해 안정적인 배당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70년대 초에 는 저축 자금을 고리 사채로 운용하는 것이 가장 수익이 높고 안 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8.3 조치로 자금이 묶이고 심 지어 낮은 금리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으니, 정부에 대&nbsp;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nbsp;더 나아가 이 사건 이후 박정희 정부의 독주가 시작된 것도 경제 전체를 놓고 볼 때 큰 문제가 되었다. 1969년 7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괌에서 이른바 &#39;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 &#39;을 발표&nbsp;하며 "동맹국과 우방국의 방위와 발전"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예&nbsp;정이지만, "모든 자유 국가의 방위를 전담하지는 않겠다."라고&nbsp;선언하였다. 더 나아가 주한 미군 중 약 2만 명, 즉 미군 전투 부&nbsp;1992년은 한국 주식 시장의 역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진 해였다. 첫 번째 사건은 1989년부터 시작된 주식 시장의&nbsp;하락세가 멈추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국인 투자자들이&nbsp;한국 주식을 매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이다. 물론 1980년&nbsp;대부터 코리아 펀드 형태로 외국인의 간접적인 한국 주식 매수&nbsp;가 가능했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직접 한국 주식을 매입하는 것 은 불가능했고, 코리아 펀드가 폐쇄형 펀드라는 특성이 있었기 에 투자자들의 불편함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에 노태우 정&nbsp;부는 1991년 9월 3일에 주식 시장의 점진적인 개방을 발표하고,&nbsp;1992년1월 3일부터 시행하였다. 외국인 투자자에 의한 경영권 위협을 막기 위해 정부는 종목 별 외국인 한도를 설정했다. 기관이나 개인 투자자 등 외국인 전&nbsp;체 기준으로 상장 기업 지분의 10% 한도 내에서만 투자할 수 있었 으며 금융, 항공, 통신 등은 사업의 공익성을 감안해 지분 한도 가 8%로 제한되었다. 더 나아가 외국인 1인당 투자 한도는 3% 그리고 공익성이 강한 기업에 대한 한도는 1%로 제약되었다. 매 우 타이트한 규제였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의 미래 를 낙관하며 개방 첫해부터 대규모 순매수를 기록했다.&nbsp;1992년 한 해 동안의 순매수 규모는 1.5조 원에 달했고, 1993년에는 4.3 조 원까지 확대됨으로써 1992년 여름부터 증시가 본격적인 상 승세로 돌아서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43&nbsp;최근에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하루에도 1조 원 이상의 순매수 나 순매도를 기록하기에 큰돈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nbsp;그러나 당시 주식 시장의 규모가 최근과 비교할 수 없이 작았기 에, 1992년 말 외국인 투자자의 지분율은 4.9%까지 상승했으며, 1993년에는 무려 9.8%에 이를 정도로 상승했다. 1991년 9월에&nbsp;만들어진 한도가 종목당 10%였으니 1993년에 이미 대부분의 우량주 주식 투자 한도가 목에 찬 상황이었다. 이 영향으로 1994 년 외국인 투자자들의 순매수 규모가 0.9조 원으로 줄어들자 정 부는 1994년 12월 1일부터 1997년 11 월까지 총 6차례에 걸쳐 투자 한도를 인상해, 외환 위기 직전에는 26%까지 올렸다.&nbsp;이상과 같은 외국인 주식 투자 확대는 한국 증시에 두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하자면, 이른바 저평가 우 량 기업 대주주의 지분 규모가 줄어들었기에 배당을 지급해 봐 야 대주주에게 떨어지는 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 는 1984년부터 시작된 주식 시장의 상승 국면에서도 한국 기업 의 배당 수익률이 오히려 떨어졌다는 점이다. 증시 호황 속에 이&nbsp;뤄진 시가 발행으로 주식 시장에서 넉넉하게 자금을 조달한 후&nbsp;입을 닦아버린 셈이다.&nbsp;이런 면에서 1992년의 시장 개방은 큰 의미를 갖는다. 외국 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에 저평가된 기업들이 매우 많다는 것&nbsp;을 알고, PER이 낮은 기업을 집중적으로 매수했기 때문이다. 태 광산업이나 대한화섬 그리고 신영와코루 등 PER이 시장 평균에 비해 크게 낮은 기업들은 외국인 투자자의 집중적인 매수에 힘 입어 적게는 5배 많게는 10배 이상 급등했다. 참고로 PER이 낮 다는 것은 실적에 비해 주가가 낮은 수준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시장 참가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기업이라는 것을뜻한다.물론 기업의 미래 수익 전망이 밝지 않아서 PER이 낮게 형성 된 기업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태광산업의 경우 신소재 섬유 제품을 만들고 있어 수익성이 높았음에도 저평가되었던 것은 결국 사양 산업에 속한 기업이라는 낙인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 보유 비중이 높아지는 가운데 기업의 태도가 달라진 것도 저 PER 기업의 주가 상승을 유 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적이 뛰어난 데도 주가가 저평가된것은 시장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탓도 있지만, 주주들이 느끼기에 "기업 실적이 주식 가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rdquo;라고 생각하 게 한 경영진의 태도 문제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외국 인 보유 비중 확대는 기업의 자본 정책을 바꾸고, 이게 다시 재 평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가져온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nbsp;주식 시장 개방이 한국 증시에 미친 두 번째 영향은 해외에 서 발생한 충격이 즉각 한국 경제에 반영된 것을 들 수 있다.&nbsp;1992년 시장 개방 이전에는 해외에서 발생한 경제 충격이 시간&nbsp;을 두고 한국 증시에 반영되었으며, 영향력도 상대적으로 크지&nbsp;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87년 10월 19일에 있었던 블&nbsp;랙 먼데이Black monday 다 미국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가 하루에 22% 이상 폭락했지만, 10월 20일에 KOSPI는 단 12포인트 하락 (-2.4%)에 그쳤다. 이렇게 한국 증시가 해외 충격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해외 시장과 국내 시장의 매매 주체들이 서로 다&nbsp;른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해외의 플레이어들이 국내 시장&nbsp;에 진입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nbsp;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주도주의 동조성이다. 1992년 시장 개방 직후에는 저 PER 주를 비롯한 저평가 기업들에 대한 관&nbsp;심이 높았지만,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미국 나스닥 시장 이 강력한 상승세를 펼치는 가운데 한국 주식 시장에서도 반도 체와 통신 그리고 친환경 분야를 중심으로 주도주가 재편되기&nbsp;시작했다. 필자가 1996년 국책연구소에서 모 증권사로 직장을&nbsp;옮겼을 때 가장 뜨거운 분야가 바이오 분야와 반도체 그리고 매&nbsp;연을 절감해 주는 장치를 개발한 기업들이었던 기억이 선명하 다. 실제로 창업 초기의 성장 국면에 위치한 기업들이 다수를 이&nbsp;루는 코스닥 시장이 출범한 것도 1996년 5월의 일이었다.&nbsp;그러나 주식 시장 개방이 한국 증시에 긍정적인 영향만 준 것 은 아니었다. 1997년 7월에 발생했던 태국의 외환 위기가 한국 과 홍콩 등 동아시아로 전이되었던 것도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 / 규모 순매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즉 1992년 시장 개방 이후 한 국 증시는 해외 충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nbsp;물론 국내 요인이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이야기 는 아니다. 정부의 산업 정책 그리고 한국은행의 통화 정책은 국 내 주식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임이 분명하다. 다만 1992&nbsp;년 이전에 비해 국내 요인의 중요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이야기 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더 나아가 세&nbsp;계 경제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판단하는 게 투자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잣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필자를 비롯한 수많은&nbsp;한국의 경제 분석가들이 미국 경제 지표와 시장 흐름을 분석하 느라 밤잠을 못 이루게 된 것은 모두 1992년에 시작되었다고 볼&nbsp;수 있으며, 앞으로도 이런 분위기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Mon, 03 Jun 2024 23:15:2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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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주식회사 이야기</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44</link>
			<description><![CDATA[주식회사 이야기. 이준일. 이콘출판. 2023. 2. 17.머리말: 자본주의에서 주식회사의 의의&nbsp;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것은 수많은 기업이 여러 물&nbsp;건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업 아래 모여 각자 특화된&nbsp;분야를 맡아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기업이 없었을 때에도&nbsp;사람들은 분업을 했지만, 기업만큼 조직적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기업에서&nbsp;일해 번 돈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nbsp;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기업은 생산을 담당하는 핵심 엔진이라고 할 수&nbsp;있다. 그러면 자본주의에서의 &#39;생산&#39;은 다른 경제체제와 무엇이 다를까? 자&nbsp;급자족을 위한 경제체제에서의 생산은, 주로 자신의 소비를 위한 것이다.&nbsp;왕, 귀족, 정부 등 통제기구의 명령에 따르는 경제체제에서의 생산은 통제&nbsp;기구의 목적에 따른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생산은 이윤을 위한 것이다.&nbsp;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만큼,&nbsp;자본주의에서의 생산은 자발적인 혁신의 노력을 이끌어 놀라운 성과를 이&nbsp;머리말: 자본주의에서 주식회사의 의의&nbsp;료&nbsp;우리의 삶과 기업들&nbsp;7시. 스마트폰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일어나 정&nbsp;수기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신다. 세면대에 물을 받고서 비누로 세수를 한&nbsp;다. 거품을 내어 꼼꼼하게 면도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는다. 아침&nbsp;은 전기밥솥으로 갓 지은 밥에, 냉장고에 보관한 밑반찬과 새벽배송으로&nbsp;받은 신선한 샐러드를 먹는다. 식사 중에 잠깐 메일을 확인하고, 메시지에&nbsp;답을 하고, SNS를 살펴본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웹툰도 보고, 동영상을&nbsp;시청하다 보면 어느새 일터에 도착한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출근길 일&nbsp;상이다.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아침이다.&nbsp;이 모든 과정에 기업이 있다. 스마트폰(삼성전자) 정수기(웅진코웨이),&nbsp;1장 기업 회사는 디어이기]]></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Mon, 03 Jun 2024 23:05:3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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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 권력의 미래. 조지프 나이</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43</link>
			<description><![CDATA[권력의 미래. 조지프 나이&nbsp;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nbsp;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인 '권력'은 몹시 파악하기도 힘들고&nbsp;측정하기도 어려운 개념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그 개념이&nbsp;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나는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3.6배&nbsp;많이 사랑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사랑의 중요성을 부정하지&nbsp;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nbsp;권력을 경험하며, 비록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하지만 권력은 실제&nbsp;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따금 분석가들은 너무 모호하고 부정확하다&nbsp;는 이유로 그 개념을 폐기하려고 하지만, 이미 그것을 대체하기 어&nbsp;렵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nbsp;영국의 위대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한때 사회과학에서 다루]]></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Mon, 03 Jun 2024 22:56:5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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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한국 자본주의(3) 장하성 지음</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42</link>
			<description><![CDATA[한국 자본주의(3) 장하성 지음&nbsp;재벌과 한국 경제의 모순&nbsp;/ 재벌 편중과 재벌 양극화 I&nbsp;한국 경제에서 재벌의 의미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nbsp;첫째는 재벌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다.&nbsp;둘 째는 재벌들이 하지 않는 사업이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사업에 진출 해 있다는 것이다.&nbsp;셋째는 재벌 그룹에 투명성과 책임성이 없다는 것 이다.&nbsp;첫째와 둘째는 재벌의 규모와 사업 영역의 문제이고, 셋째는 재 벌의 경영 행태의 문제다. 한국 경제에서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 것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김상조 교수가 그의 저서 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필자는 그가 분석한 내&nbsp;용을 바탕으로 논의할 것이며,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독자들은 그 책을 읽어볼 것을 권유한다..&nbsp;한국 경제가 재벌에 의존하는 비중은 여하한 기준에서 보더라도 지나치게 높을 뿐만 아니라 그 비중이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2011년 기준으로 30대 재벌 그룹은 한국 기업들 총매출액의 약 40%를 참치하고 있으며, 국가 총자산의 약 37%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자&bull;산 규모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95%이다. 이러한 비중들은 1990 &bull;년대와 비교해서 크게 증가한 것이며, 특히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55한국 경제가 30대 재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뿐 아니라, 재벌 그룹들 중에서도 상위 4대 재벌과 기타 재벌들 간 양극화가 존재하 며 갈수록 심화되는 추세다. 56 상위 4대 그룹 중에서 특히 삼성그룹 과 현대자동차그룹으로의 편중 현상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다.범()삼성, 범현대, 범LG, SK의 범4대 재벌 그룹이 소유한 자산은 국가 총자산의 26%이며, 범4대 재벌 그룹의 매출액은 한국 총매출 액의 20%를 차지한다. 이는 30대 재벌 전체 자산의 68%, 그리고 매출액의 52%를 차지하는 것이다. 30대 재벌의 절반 이상을 범4대 재벌 그룹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58 상황이 이러하니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에게 투자와 일자리를 구걸하는 일이 정권마다 반복되고 있다. 재벌 그룹으로 분류하지 않고 단순하게 200대 대기업으로 살펴봐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경제의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상위 대기업과 하위 대기업 간에 격차가 커져서 대기업 간에도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는 추세다.&nbsp;한국 경제의 재벌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주식시장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2014년 5월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 중에서 삼성, 현대, LG, SK 4대 그룹 상장 계열사의 비중은 거의 절반에 가까 운 46%이다. 이는 2008년 25%인 것과 비교해서 크게 늘어난 것이다. 2014년 5월 삼성그룹 혼자서의 비중은 25%이고, 현대차그룹은 11%로 상위 2대 그룹의 비중만으로도 시장 전체의 3분의 1을 넘는 36%이다. 2008년 삼성그룹의 비중은 19%였고, 현대차그룹의 비중 은 4%인 것과 비교하면 상위 2대 그룹의 비중이 최근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다.&nbsp;구성의 모순: 효율성 이론과 경쟁의 효율성경제학에는 효율성과 관련된 &#39;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39;와 &#39;범 위의 경제(economies of scope)&#39;라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규모의 경제란 하나의 제품을 생산할 때 생산 규모가 커질수록 단위당 비용이줄어들어서 효율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규모의 경제는 규모가 일정한 수준에 다다를 때까지 성립한다. 범위의 경제는 하나의 제품만 생산하기보다는 생산설비나 생산기술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제품을 생산하면 비용이 낮아져서 생산의 효율성이 높아진다는것이다.또한 경영학에서는 기업이 한 가지 사업만 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사업을 함께하는 것이 위험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인다는 &#39;사업 다각화(business diversification)&#39; 이론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동차 회사가 자동차 부품 사업을 함께하는 것과 같이서로 연관된 사업을 하는 것이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는변칙적 다각화다. 다른 말로 하면 &#39;전방 효과&#39;나 &#39;후방 효과&#39;가 큰 사업을 같이 하면 시너지(synergy)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아이스크림 장사와 우산 장사와 같이 서로 연관성이 없는 사업을 함께하면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장사할 수 있다는 수평적 다각화다.하지만 개별 기업들의 효율성과 관련된 이러한 이론들을 시장에 적용할 경우, 경쟁을 통해서 효율성을 내는 시장경제의 경쟁 원리와 모순이 발생한다. 규모의 경제를 시장에 적용하면 어떤 제품을 여러 개의 작은 기업들이 생산하는 것보다 대기업 하나가 더 효율적으로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규모의 경제로 효율성을 달성할 수 없는 작은 기업들은 모두 도태되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한 대기업 들만이 시장에 살아남아서 시장은 자연적인 과점 구조가 된다.&nbsp;범위의 경제와 수직적 다각화 경우를 시장에 적용하면 한 가지 사업에만 집중하는 기업보다는 전자와 자동차, 철강과 자동차, 자동차와 타이어, 타이어와 중화학, 철강과 조선, 가구와 호텔, 이런 식으로 수직적인 연과성이 있는 사업을 함께하는 기업들이 더 효율성이높을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장에는 연관된 사업을 하는 기업들만 살아남게 되어 시장은 역시 과점 구조가 된다. 범위의 경제와수평적 다각화를 시장에 적용하면 전자, 자동차, 타이어, 중화학, 철 강, 조선, 호텔, 가구 그리고 그런 공장들을 짓는 건설업과 부동산업등 거의 모든 사업을 함께하는 회사들이 더 효율적이고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 된다.&nbsp;규모의 경제, 범위의 경제, 사업 다각화의 두 가지 효율성 이론을함께 시장에 적용하면 시장에는 원재료, 중간재, 완제품을 모두 함께 생산하면서 거의 모든 사업을 다 하는 대기업 그룹, 즉 재벌들만 시]]></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Mon, 03 Jun 2024 22:54:1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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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한국 자본주의(2) 장하성 지음</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41</link>
			<description><![CDATA[한국 자본주의(2) 장하성 지음&nbsp;시티은행은 한국의 증권예탁원과 마찬가지로 여러 외국인 주주 들의 주식을 보관하는 &#39;예탁 기관&#39;인데도 마치 실질적으로 주식을 소유한 주주인 것처럼 보도했던 것이다. 심지어 삼성전자가 외국인 주주에 의해서 적대적 인수&middot;합병 되면 본사가 외국으로 옮겨가서&nbsp;한국 경제가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식의 기사와 사설로 국민 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언론들도 있었다. 이로부터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어느덧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의 유수 기업에 대해서 외국인 주주들이 호시탐탐 적대적 인수&middot; 합병 기회를 엿보고 있는&nbsp;듯한 분위기가 급속도로 번졌다. 이렇게 삼성전자가 유발한 외국인 적대적 인수&middot; 합병 위기설은 일종의 굴절된 애국심에 호소한 전략이 라고 볼 수 있다.&nbsp;삼성그룹의 자작극에 가까운 적대적 인수 합병 주장과 이에 동 조하는 친재벌 언론과 정치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공정거래법은 개정되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삼성이 주장했던 외국 인 주주에 의한 적대적 인수 &middot; 합병은 시도된 기미조차 보인 적이 없&nbsp;었다. 외국인 주주들의 지분이 50%를 훨씬 넘어서는 많은 기업들이 있었지만 하나의 기업을 제외하고는 외국인 주주에 의한 적대적 인 수&middot;합병이 시도된 적도 없었다. 예외적인 하나의 기업은 SK였다. SK 가 적대적 인수&middot; 합병의 대상이 된 것도 최태원 회장과 한국 투자자&nbsp;들이 자초한 일이었다. 2003년 초에 검찰이 SK그룹의 1.5조 원에 이르는 거대한 분식 회계를 밝혀내자 주가가 폭락하고 SK 주식의 투 매 현상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진 당시에 소버린(Sovereign Asset Management)은 불과 2, 3개월 만에 SK 주식을 15%나 시장에서 사들여서 SK의 1대 주주가 되었다. 그리고 2004년 주주총회와 2005 년 방법으로 경영&nbsp;주주총회에서 자신들이 추천한 이사를 선임하는 두 번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1대 주주임에도 불구하고&nbsp;특히 소버린의 경영권 도전이 최고조에 다다랐던 2004년 중에는 SK의 외국인 지분이 62%까지 늘어났고, 2005년 주주총회에서의 외 국인 지분도 삼성전자와 같은 54%였다.61 SK의 경영권에 도전한 소 버린은 자신이 15%를 소유한 1대 주주였기 때문에 5%를 넘는 외국&nbsp;인 주주가 없었던 삼성전자와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소버린이 경영권 도전에 실패한 이유는 외국인 주주들이 소버 린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SK-소버린의 사례는 단순하게 외 국인 지분이 50%를 넘으면 외국인들이 똘똘 뭉쳐서 한국 기업을 적&nbsp;대적으로 인수&middot; 합병할 것이라는 생각이 &#39;괴담&#39;류의 황당한 망상이 라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주식회사란 정한 다수의 일반 사람들에게 주식을 발행해서 자기자본을 조달하&nbsp;것이다. 따라서 주식회사가 상장되면 소수의 주주들이 소유했던&nbsp;은 새로운 주주들에게 매각하고 소유가 분산되는 것 이 정상적이다. 따라서 상장 역사가 오래되고 신주 발행으로 조달한 자본을 기반으로 성장한 회사들은 불특정 다수의 주주들이 주식을 소유하게 되어 분산된 소유 구조를 갖는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 들도 대부분이 주식시장에 상장을 해서 조달한 자본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창업자의 후손들이라 할지라도 오너라고 불릴 만한 지분을 가진 주주가 드물다. 소유가 분산된 선진국들의 상장회사들에서는 창업자의 후손들이 경영권을 장악하거나 경영에 참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국의 재벌 그룹에서는 소유 지분과 별 관계없이 창업자의 후손들이 최고 경영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nbsp;물론 선진국에서도 창업으로 성공한 대기업은 창업자가 대주 주로서 경영을 책임지는 기업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 트(MS)의 빌 게이츠(Bill Gates)는 1975년에 동업자인 폴 알렌(Paul Allen)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고 1986년에 주식을 상장 한 이후 49%의 지분을 소유한 대주주로서 2000년까지 최고 경영 자(CEO)의 직위를 가졌고, 이후에는 2008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nbsp;빌 게이츠는 당대 창업자이지만 현재논 4.8%의 소수 지분만을 소유 하고 있고,65 지금은 이사로서 이사회 의장직만을 맡아서 회사에 상근하자 않으며 이사회를 통해서만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그의 자 식이나 친인척이 경영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빌 게이츠나 그의 가 족 또는 재단이 경영권을 &#39;장악&#39;하고 있지도 않다.&nbsp;재벌 그룹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총수 가족들이 최 경영자의 자리를 마치 상속재산인 것처럼 자신들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기업 내부에 총수의 경영을 견제하거나 경영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통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다. 통제받지 않는 권한을 가지면서도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 며, 누구도 경쟁적으로 도전할 수 없는 재벌 총수들의 경영을 &#39;황제 경영&#39;으로 비유하기도 한다.&nbsp;대부분의 재벌 그룹들은 창업자의 2세, 3세들이 총수를 맡고 있 는 경우들이 많다. 2세들은 아버지인 창업자가 기업을 세우고 성장 시키는 과정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고 회장 자리의 승계를 두고 형제 들 사이에 경쟁하거나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경영 능력에 대한 간 접적인 검증을 거친 경우들도 있다. 그러한 2세들의 경우에도 경영 성과는 서로 크게 엇갈린다. 창업자의 후손들이 경영을 승계해서 기 업을 더 성장시킨 경우도 있지만 그룹이 위축되고 심지어는 파산 상 태에 이른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1997년 외환 위기때, 30대 재벌 그&nbsp;룹 중에서 무려 18개의 그룹이 파산해서 해체되었다. 이 중에는 창업&nbsp;자가 총수인 경우도 있고 2세가 총수인 경우도 있었다. 대우그룹은 창업자인 김우중이 회장을 맡고 있는 중에 파산을 했고, 다른 그룹 들은 창업자의 2세들이 회장을 맡은 상황에서 파산했다. 최근에 파 산한 웅진그룹의 경우에는 창업자인 윤석금이 회장을 맡은 상황에&nbsp;서 파산했고, 동양그룹은 2세인 현재현이 회장을 맡은 상황에서 파산을 했다. 이&nbsp;이건희는 1987년 이후 지난 25년간 삼성그룹의 회장을 맡은 후에 성장시킨 대단한 경영&nbsp;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항시 성공만을 거둔 것은 아니다.&nbsp;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패한 크고 작은 사업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실패가 삼성자동차를 설립한 것과 미국의 컴퓨터 회사인 AST를 인수한사 삼성자동차의 파산으로 2조 원 이상의 투자 손실을 감수했으며, 삼 성전자 등의 계열사들은 삼성자동차에 지급보증을 해준 것으로 인해서 3,000여억 원의 손실을 보았다. 삼성전자가 1995년 나스닥에 상장되어 있는 세계 6위의 컴퓨터 제조업체인 AST를 인수한 후 나스닥에 상장폐지하고 삼성그룹의 계열사로 편입했다. 그러나 경 영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1999년 2월 미국의 투자자 그룹에게 지분을 매각하고 7,000여억원 이상의 투자 손실을 보는 실패로 마감여 법정 관리를 받다가 2000년 프랑스의 르노자동차에 매각되었다.&nbsp;대부분의 재벌 그룹들은 현재 경영 능력을 검증받지 않은 3세대 로 경영이 세습되었거나 세습되는 과정에 있다. 성공적으로 기업을성장시킨 창업자나 성공적으로 경영을 승계한 2세들도 경영에 실패 한 많은 사례들에 비춰볼 때 3세들이 경영을 승계했을 때 위험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창업자의 후손들이 경영을 승계해서 성공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한 기업의 경우라 할지라도 성공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3세대와 4세대로 이어지는 &#39;세습 경영&#39;이 좋은 경영성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3세들 대부분은 기업이 이미 성장해 대규모가 된 이후에 태어나서 2세와 같이 창업자의 경영이나 성공 과정을 지켜볼 기회도 없었고, 아버지의 배려로 안정적인 보호막 속에서 경영 수업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창업자나 2세들과는 다르다.&nbsp;전문 경영자는 최고 경영자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경쟁을 다. 검증받는다. 그러나 경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 고 최고 경영자의 자리를 세습한 재벌 총수의 후손들이 견제를 받지 않는 황제 경영을 하는 것은 기업의 생존이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노동자, 공급자, 투자자의 운명을 걸고 도박하는 것과 같은 것 이다. 최고 경영자가 경영 성과를 내지 못하면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nbsp;최고 경영자가 교체되듯이 기업과 경영자의 운명은 다르다. 마찬가 지로 재벌 그룹도 회사들과 총수도 다르다. 따라서 재벌 총수의 &#39;경 영할 권리&#39;를 보호해줘야 할 것이냐, 아니면 기업과 기업의 이해당사 자들의 생존을 보호해줘야 할 것이냐를 묻는다면 그 답은 불을 보듯 이 명확할 것이다.&nbsp;재벌 그룹 회장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비자금, 차명 재산, 횡령, 배임, 탈세 등의 불법행위들로 형사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교 도소에서 실형을 살지 않고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몇 년 후에는 다시 사면을 받았다. 2세들은 창업자로부터의 재산상속의 과정에서도 차&nbsp;명을 이용해서 상당 부분의 재산을 은닉했기 때문에 상속 과정이 불투명했고 제대로 상속세를 낸 경우가 드물었다. 삼성그룹의 경우에 는 창업자 사후 25년이 넘은 지금에도 형제간의 상속재산에 대한 법 적 다툼이 진행되고 있다. 총수 개인과 가족들이 회사와의 편법적 또&nbsp;는 불법적인 거래를 통해서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부당 거래의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이익을 부풀리고 손실을 감추는 분식 회계가 관 행이라는 이유로 묵인되었고 이를 자진해서 신고하면 처벌하지 않 는 특혜를 주기도 했다.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이유, 그리고 총수가&nbsp;없으면 기업의 경영이 어려워지고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nbsp;재벌 총수들의 불법행위에 면죄부가 주어졌다. 민영화 재벌 그룹의 경영이 악화된 경우에 직접적으로는 노동자와 투자 자들이 피해를 입고 고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비용이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전가되지만, 누구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 사태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 재벌 그룹의 국가 경제에 대한 지배력이 과도 하게 커져서 재벌 그룹이 파산할 경우에 국가 경제까지 위태롭게 만 드는 시스템 리스크로 확산되는 악순환도 여러 차례 겪었다. 한국의 경제 규모와 국민소득수준이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렀고,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지도 20여 년이 지났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이 경쟁력 소유 을 갖는 최선의 길은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생존하고 성 장하는 것이다.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책임지는 최고 경영자의 자리 노동분배 역시 마찬가지다. 기업 내부의 승진 과정에서 또는 전문 경영인 시장&nbsp;에서 경쟁을 통해 경영 능력을 검증받은 사람이 최고 경영자의 책임 을 맡는 것이 당연하다. 상장회사 최고 경영자의 자리가 창업자 후 손들의 기득권이 되어 대물림하며 세습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는 시장경제에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재벌 기업과 총수들의 불법 율성 행위를 과거의 관행으로 여기며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nbsp;왕조가 아니라면 사회주의(Socialism) 독재 체제에서도 정치권력은 기억투 끊임없이 도전을 받으며 세습되지 않는다. 재벌 총수의 &#39;황제 경영 권&#39;을 보호해주고 세습해야 한다는 주장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기 득권 세력의 궤변일 뿐이다.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의 운명과 국가 경 제의 미래가 걸려 있는 &#39;경영권&#39;은 보호받아야 할 특권이 아니라 오&nbsp;히려 도전과 경쟁의 대상이다.&nbsp;한국 자본주의의 색다른 발전 경로 |한국은 20세기 초 일제(日帝)의 강점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무너졌고, 서구에서와 같이 계급분화 과정이나 시민혁명을 통해서 봉건 체제가 붕괴되는 역사적 단계를 밟지 않았다. 광복 이후에는 정부가 수립된 지 2년 만에 한국전쟁을 겪게 되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적인 틀을 갖출 기회도 갖지 못했다. 1960년대 초 산업화가 시작되기까지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에서 대부분의 국민은 빈곤상태에 있었고, 경제적으로 분화된 계층도 형성되지도 않았다. 산업 화가 시작된 이후는 군사독재 정권의 철저한 통제에서 시행된 계획&bull;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고 경제 발전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경제체제였기 때문에 시장경제가 작동한 것도 아니었다.&nbsp;자 외 ○사 회사에 전자 품을 납품하는 수많은 중소기업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자만이&nbsp;것 운&nbsp;니라 자동차까지 삼성이 완전히 장악했다면 한국 경제의 거의 모든 스&nbsp;아 기 것을 삼성이 좌우했을 것이다. 한국 경제가 삼성그룹에 절대적으 매&nbsp;의존하게 되는 구조가 삼성과 이건희에게는 효율적이고 좋은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에는 효율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악이 것일 를&nbsp;될 수도 있는 것이다.&nbsp;이건희는 삼성그룹 내부의 힘을 빌려 삼성자동차를 성공시키겠 다면서 동시에 다른 자동차 회사와의 경쟁을 통해 자동차의 품질과 서비스를 높이는 것이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내부의 힘을 빌리는 것이 삼성자동차에게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그것은&nbsp;불공정 경쟁이며 한국 자동차 산업과 국가 경제에는 비효율적인 것 이다. 이건희는 개별 기업의 효율성이 시장과 국가 경제에 효율성과 일치하지 않는 구성의 모순&#39;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개별 기업의 효율성이 불공정한 경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욱 그러&nbsp;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삼성자동차는 실패했다. 그러나 삼성자동차만이 아니었다. 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 기아자동차 모두가 파산했다. 그러기에 삼성자동차의 실패가 외환 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효율성의 모순 때문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nbsp;|죽 쒀서 절대 남 안 준다!|&nbsp;재벌 그룹들이 너도나도 하는 사업들이 있다. SI 사업, 건설업, 물류- 운송업, 광고업, 골프장 사업은 재벌 그룹의 계열사가 아니면 생존하 기 어려울 정도로 &#39;춘추전국 업종&#39;이다. SI 사업(system integration, 시 스템 통합 서비스)은 10대 재벌 그룹 중에서 9개 그룹이 계열사를 가&nbsp;지고 있고, 20대 중에서는 16개, 30대 중에서는 22개 그룹이 계열사&nbsp;를 가지고 직접 사업하고 있다. 건설업은 10대 재벌 그룹 중에서 7개&nbsp;그룹이, 20대 중에서는 16개, 30대 중에서는 23개 그룹이 직접 사업&nbsp;을 한다. 물류-운송 사업은 10대 재벌 그룹 중에서 9개, 20대 중에서&nbsp;는 16개, 30대 중에서는 20개 그룹이 사업을 한다. 광고업도 10대 재 벌그룹 중에서 7개 그룹이 계열사를 가지고 있다.&nbsp;경제적인 이유인 지 아니면 개인적인 선호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재벌 그룹들 이 골프장 사업을 한다. 10대 재벌 그룹은 10개 모두, 20대 중에서는 16개, 30대 중에서는 22개 그룹이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다. 호텔 사 업은 10대 재벌 중에서 8개, 20대 중에서는 12개 그룹이 하고 있다.&nbsp;SI 사업, 건설업, 물류-운송업, 광고업과 같은 사업들은 그룹 내 부의 수요만으로도 최소한의 규모의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계열사는 외부 업체에 외주를 주는 그룹 전체의 창구 역할만을 하고도 일종의 &#39;통행세&#39;를 중간 마진으로 챙겨도 돈&nbsp;을 벌 수 있는 사업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사업들은 계열사를 만들어서 일감 몰아주기로 회사를 운영한다. 광고 회사인 삼성 그룹의 제일기획과 현대자동차의 이노션이 그렇게 성장했다. 현대자 동차의 물류 회사인 현대글로비스도 그런 방식으로 성장했다. SK그&nbsp;룹의 SI 계열사인 SK C&C가 그렇게 돈을 벌었다. 이런 종류의 사업 에서는 재벌 간 불공정 경쟁도 흔한 일이다. 최근에 물류 사업이 핵 심 주력 사업의 하나인 CJ그룹의 CJ GLS가 물류-운송 전문 기업인 대한통운을 인수했다.&nbsp;그런데 인수한 지 6개월 만에 매출이 1조원줄어들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삼성그룹이 CJ와의 거래를 갑자기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69 삼성그룹에서 SI 사업을 하는 계열사인 삼 성SDS가 앞으로 물류 사업에 진출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대한통운 인수전(戰)에서 CJ와 삼성이 경쟁을 했는데 CJ가 이겼고, 이즈음 상속재산을 두고 이맹희, 이건희 형제간의 소송 다툼이 있었다.그리고 삼성SDS는 이재용이 최대 주주로 있고, 앞으로 주식시장에 상장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비상장회사다. 삼성이 CJ와의 거래를 잡 자기 끊어버린 이유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랫동안 유지해 온 거래를 끊어서 물류와 관계없는 사업을 하는 계열사에게 넘겨주는 것은 일감 몰아주기로 사업을 확장하는 재벌 그룹들의 전형 적인 행태다.모든 재벌들이 다 하는 이런 사업에는 절대 강자가 없으며, 경영능력이나 효율성이 아니라 그룹 내부의 수요가 얼마나 큰가로 회사 의 경쟁력이 결정된다. 이런 와중에서 재벌 그룹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회사들은 경쟁하기 힘들고, 다만 재벌 계열사들의 재하청기업 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재벌 그룹에 속하는 회사들 중에서도 이러한 사업을 핵심 사업으로 하는 회사들이 있지만, 그 회사들도 다른 재 벌들이 물량을 주지 않으니 성장에 한계가 있다. 한국은 &#39;국내총생산 대비 국가 물류비 비중이 11% 수준으로 미국이나 일본의 7~8% 수준보다 높다. 그 만큼 물류비를 줄일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재벌 그룹들마다 내부 물량으로 물류운송 회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 시장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물류비의 낭비를 줄이기 어렵다. 재벌들마다 물류운송 사업을 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세계적인 물류 업체인 DHL이나 UPS같은 초일류 기업의 출현을 기&nbsp;대할 수 없는 이유다.&nbsp;물류 사업처럼 재벌들이 계열사들의 내부 수요만으로도 운영할&nbsp;수 있어서, 굳이 다른 외부 회사에 외주를 줄 이유가 없는 사업은 수 없이 많다. 사업상 술자리가 많으니 술집을 차리고 그룹의 수많은&nbsp;계열사들의 임직원들만 이용해도 장사가 잘될 것이다. 그리고 임직&nbsp;원들의 안전한 귀가를 위해서 대리운전 사업을 함께해도 좋을 것이다. 그룹 차원에서 결혼, 승진, 장례에 보내는 축하 화환과 조화를 보 내야 하는 일도 수없이 많으니 꽃 배달 서비스를 해도 돈을 벌 수 있&nbsp;을 것이다. 회사 근처에 음식점을 차리고, 그룹 임직원들의 회식을&nbsp;모두 그 음식점에서 하도록 해도 돈을 벌 것이다. 재벌이 설마 그런 치사한 사업까지 하겠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유사 한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과 같이 재벌 그룹들이 일 감 몰아주기 내부 거래로 사업을 계속 확장한다면 한국 경제가 꽃집&nbsp;까지 재벌들이 하는 구조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개 별 기업의 효율성과, 시장과 국가 경제의 효율성 사이에 존재하는 구 성의 모순이 한국 경제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현실이다.&nbsp;|끝도 시작도 없는 소유의 미로|&nbsp;앞에서 논의한 재벌 구조의 여러 가지 문제들의 근본적인 출발점은 소유 구조다. 재벌 총수와 가족들이 소유한 계열사들의 지분은 극히 적거나 아예 지분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대를 이어서 경영권을 확&nbsp;박정희 향수 향수인가, 환상인가? 1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한국 사회 곳곳에 아직도 계획경제 시대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최근에 50대, 60대 이상 에서 소위 &#39;박정희 향수&#39;라는 현상이 폭넓게 나타나고 있는데, 보수우파에게는 큰 정치적 자산을 제공하고 있다. 박정희 향수의 실체가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조사된 것이 없지만, 계획경제 시대의 고도성장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것과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라는 것 두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다. 박정희의 리더십을 말할 때그 개인의 역량이나 자질에 초점을 맞추는 주장들이 있다. 하지만 박정희의 강력한 리더십은 5.16 군사 쿠데타로 시작해서 유신헌법(維新憲法)으로 이어진 독재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독재 체제의 배경을 배제하고 박정희 리더십을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nbsp;박정희의 리더십을 민주화 시대에 다시 재현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을 뿐 아니라 이 책의 취지와도 거리가 있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nbsp;여기에서는 계획경제 시대의 높은 성장률 재현을 기대하는 &#39;박정희&nbsp; 향수&#39;에 대한 것으로 국한하고자 한다.&nbsp;혹자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일정 부분 &#39;박정희 향수&#39; 덕분이&nbsp;라고 보고 있는데, &#39;박정희 향수&#39;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박정희 시 대의 고성장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이든, 그&nbsp;와 동일한 선상의 정권이든 아니면 어떤 정권이든 박정희 시대에 이&nbsp;루었던 고성장을 다시 재현할 수는 없다. 그것은 향수가 아니라 환 상일 뿐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경제법칙 때문이 고, 둘째는 한국 내부 요인 때문이고, 셋째는 외부 환경 때문이다.&nbsp;첫 번째 이유는, 박근혜 정부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경제 규모가 커진 성숙 단계에 진입하게 되면 더 이상 개발 도상 단계의 고성장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 집권 첫해&nbsp;인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2달러였고, 이는 세계 78위였&nbsp;다. 그리고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한국 경제는 연평균 8.3%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집권 마지막 해인 1979년 1인당 국민소득은 1,747달러에 이르러 세계 48위로 상승했다.17 그러나 당시에도 국민&nbsp;소득 2,000달러가 되지 않은 개발 도상 단계의 후기 또는 중진국 초&nbsp;기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에서 훨씬 더 나아가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박근혜 시대에 국민소득 2,000달러도 되지 않았던 개발도 상국에 머물러 있던 30년 전 박정희 시대의 8~10%의 고성장을 다시 달성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nbsp;경제원론에 &#39;수확체감의 법칙&#39;이 있다. 생산 규모가 커지면 커질 수록 투입하는 요소에 비례하여 생산, 즉 수확이 증가하는 속도는 점점 더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요소 투입의 효과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보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법칙을 경제 전체에 적용해도 마찬&bull;가지의 결과가 나온다. 산업화 초기에는 조금만 투자를 해도 생산이 급격하게 증가하지만, 경제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 초기 단계만큼 의 투자 효과에는 미치지 못한다.한국이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한 해는 1995년이다. 그 이후 10년 동안의 경제성장률은 1만 달러를 달성하기까지 걸린 10년 동 안의 성장률보다 크게 하락했다. 그리고 2만 달러를 달성한 2007년의 전후를 비교해도 마찬가지로 2만 달러를 달성한 이후에 성장률은 더욱 하락했다. 18 이러한 국민소득 상승과 경제 규모의 거대화에 따라서 성장률이 둔화되는 추세는 선진국들의 발전 과정에서도 마 찬가지로 나타났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의 경험에서 도 국민소득 1만 달러와 2만 달러를 기준으로 전후 10년 기간의 성장률을 비교해보면 각 단계마다 성장률은 뚜렷한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nbsp;두 번째 이유는, 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변화에 있다. 박정희 시 대는 정부가 경제를 직접 운용하는 계획경제체제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Amartya Kumar Sen)은 한국을 정부가 광범위하게 시장에 개입하고, 강력하게 통제한 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라고까지 평할 정도였다. 20 독재 체제인 박정희 시&bull;대의 계획경제체제에서는 정부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모든분야에서 절대적인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nbsp;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장의 영역과 자율성이 확대되었고, 민주주&nbsp;의가 자리 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독재 체제에서나 가능했&nbsp;던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nbsp;박정희 시대는 정부가 자원을 직접 배분하고 가격을 통제할 뿐&nbsp;만이 아니라, 공공 목적이라는 명분으로 사유재산권을 제한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인 노동조합 결성도 정부의 허가를 받 아야 했고, 임금은 정부의 소위 &#39;임금 가이드라인&#39;에 따라서 결정되&nbsp;었고, 소비자와 투자자들의 권리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nbsp;사회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나 다름없는 숨 막히는 통제 체제&nbsp;하에 있었다. 젊은이들의 머리카락과 치마의 길이는 사회 순응의 정 도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경찰이 머리가 &#39;불온하게&#39; 길다 싶은 청년 들을 붙잡아 길거리 한복판에서 가위로 머리를 자르는 장발 단속을&nbsp;했고, 잣대를 가지고 다니면서 &#39;풍속을 해친다&#39;고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단속할 정도로 국민들의 일상생활까지 통제하는 사회였다. 대 통령을 언급하는 것은 찬양 외에 비판은커녕 대중문화의 소재로만 삼아도 &#39;국가원수 모독죄&#39;라고 하는 코미디 같은 법으로 처벌을 받&nbsp;았다.&nbsp;계획경제 시대에 정부의 통제가 극에 달한 것이 유신 체제였다.&nbsp;유신 체제에서 대통령은 국회의 동의 없이 &#39;긴급조치&#39;라는 이름으로 법을 스스로 만드는 권한도 가졌다. 긴급조치 중에서 가장 우스꽝스&nbsp;러운 것이 1975년 4월에 고려대학교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39;긴급조&nbsp;치 7호&#39;였다. 그 내용은 고려대학교에 휴교를 명하고, 군대가 학교를 점령하고, 고려대학교 내의 시위를 금지하며, 이를 어기면 법관의 영 장 없이 체포하고,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다.대통령이 특정 대학교를 대상으로 법을 만들고, 시위하면 3년 이상 의 징역에 처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초법적인 것 이었다.이렇게 박정희 시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정부 시책에 걸림돌이 되는 어떠한 장애도 허용하지 않은 철저한 통&bull;제가 이뤄졌다. 설혹 독재 정권의 통제 체제가 고성장의 기반이었고,그래서 지금의 시장경제를 다시 계획경제로 되돌리고 싶다고 해도,어렵게 쟁취하고 25년 이상 발전해 온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를 용인 할 수 없다.세 번째 이유는 지난 30년간 한국을 둘러싼 세계경제가 개방체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개방경제체제 하에서는 각국의 경제는 정부의 미시적인 시장 개입조차도 감시와 견제를 받는다. 각종 정부 보조와 지원은 통합된 세계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훼손하는 요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개방경제체제의 일원 이 될 수가 없다. 더구나 수출로 먹고살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개방체제에 역행하는 정책을 시행할 경우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nbsp;계획경제 기간 동안 한국은 일종의 변형된 폐쇄경제를 유지했었 다. 적극적인 수출 지향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에 얼핏 개방경제체제 로 보일 수 있으나, 수입은 철저하게 통제했다. 외환은 단 1달러 소지도 불법이었고, &#39;국가안보&#39; 차원에서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수출경쟁력이 떨어진다 싶으면 각종 특혜와 지원금, 보조금으로 수출 단가를 맞춰주었다. &#39;낭비성&#39; 품목은 수입 금지 품목으로 지정하든지, 아니면 매우 높은 관세를 부과해서 실질적으로 수입을 막았다.&nbsp;수출 원자재나 중간재의 수입 물가가 오른다 싶으면 관세를 깎 아주거나 면제시켜주었고, 운송료도 보조해주었다.&nbsp;이렇게 수출과 수입에 대한 비대칭적인 통제 정책이 가능했&nbsp;던 것은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무역기구) 체제 이전의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nbsp;반 협정) 체제 하에서 한국이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인정받아 높은 관 세 등으로 수입을 규제하면서도 정부가 기업에 수출 보조금을 지급&nbsp;하는 것을 허용하고, 선진국들이 한국 상품에 대해서 낮은 수입관세 를 적용하는 등의 혜택을 누렸기 때문이다.22 경쟁 국가들의 불평도&nbsp;있었으나 한국의 최대 시장이었던 미국은 &#39;반공&#39;의 최첨단에 서 있는 한국을 지원, 옹호하였다.&nbsp;하지만 경제 규모, 특히 무역 규모가 커지면서 더 이상 이런 폐 쇄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고, 한국 정부는 1995년에 창설된 WTO에 가입하면서 개방체제로 전환했다. WTO 체제 하에서는 더 이상 수출과 수입에 대해서 한국에게만 유리한 비대칭적인 규제를 할 수 없으며, 만약 그런 규제를 하게 되면 교역 상대국으로부터 보 복 조치를 당할 것이고,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경제에 역효과 를 가져올 수도 있다. 박정희 시대 고성장의 가장 중요한 엔진은 수 출이었으며, 수출의 폭발적인 성장은 극도로 왜곡된 비대칭적 무역&nbsp;체제에 근거한 것이었다. 때문에 과거와 같은 고성장 시대를 부활시 키기 위해서 다시 폐쇄경제로 회귀해야 하는데, 한국의 경제구조에 서 이는 자살행위에 가까운 것이 될 것이다.&nbsp;실제로 개방경제로 전환한 이후에 정부가 과거와 유사한 방식으로 수입 규제 조치를 취해서 심각한 국제분쟁이 발생한 사례도 있 다. 국내보다 가격이 훨씬 싼 중국산 마늘의 수입으로 마늘 생산 농 가들이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자, 2000년 6월 한국 정부는 중국산&nbsp;마늘에 대한 수입관세를 대폭 인상해서 수입을 억제하려고 했다.이 에 대해 중국은 일주일 후에 보복 조치로써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nbsp;틸렌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를 취했다. 한국 정부는 마늘 관세 인상 이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서 허용되고 있는 WTO 규정에 합당한 조&nbsp;치라고 주장했지만, 중국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경제의 구조상 중국에 대한 협상력을 가질 수 없었다. 당시에 중국산 마늘의 연간 수입액은 1,800만 달러였지만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의 중국 수출액 은 8억 달러로 마늘 수입액의 무려 50배가 넘은 규모였기 때문에 마&nbsp;늘 분쟁&#39;으로 인한 피해는 한국이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분쟁 이 시작된 지 두 달 만에 한국 정부는 수입관세를 다시 낮추고 중국&nbsp;은 수입 금지 조치를 해제하는 데 합의했다.]]></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Mon, 03 Jun 2024 22:45:0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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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한국 자본주의. 경제 민주화를 넘어 정의로운 경제로.. 장하성 지음</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40</link>
			<description><![CDATA[한국 자본주의. 경제 민주화를 넘어 정의로운 경제로. 장하성. 헤이북스. 2014. 9. 25.&nbsp;계획경제체제의&nbsp;유산. &#39;경제개발 5개년 계획&#39;부터 &#39;MB 물가지수&#39;까지한국은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했고, 경제 운영의 틀이 계획경제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1 5&middot; 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부는 &#39;경제개발 5개년 계획&#39;으로 경제를 운영했다. 계획경제의 시작 단계에서는 계획이 체계&nbsp;적으로 설계된 것도 아니었고 목표치도 희망 섞인 과대치나 정치적 메시지의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군사정부는 자율적인 시장보다는 훈련된 관료와 군대식 명령 체제로 움직이는 계획경제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시작했다. 모든 사&nbsp;회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차단하고 절대적 자율성을 확보한 군사정부는 애당초 시장의 효율성을 믿었던 것도 아니었고, 시장이란 것을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원 동원력을 가진 정부 성과를 거두었다.&nbsp;자원 배분의 전권을 가진 정부는 시장의 승자를 간택할 수 있었으며, 역량이 입증되지 않는 기업이나 특정 개인에 게까지 지원과 특혜를 제공해서 성공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렇게&nbsp;30년 이상 소위 &#39;개발 연대&#39;가 지속되었고, 경제체제는 계획과 명령, 순응과 복종의 미덕이 자리를 잡게 된 반면에 시장의 자율성이란 혼란과 무질서, 탐욕과 이기주의라는 말과 등치되는 의식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오죽하면 2000년 즈음까지도 중고등 경제 교과서에서 경제활동의 목적을 &#39;국가 경제에 이바지하기 위해 외환 체서&#39;라고 규정했겠는가.계획경제체제에서도 당연히 시장이 존재했고,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분야에서는 시장 기능이 작동했다. 그러나 계획경제체제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유화와 공기업 설립을 통해 기업을 소유하고 자&nbsp;원을 배분하며 가격을 통제하거나 심지어는 직접 결정했다. 따라서 계획경제 시대에도 시장이 존재하고 일부 경쟁 구조가 작동하고 있 었지만 시장경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체제였다. 군사정권에서의 관료들은 거의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39;똑똑한&#39;&nbsp;관료들이 별로 복잡하지도 않은 산업구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장 잘 알 수 있었다. 혹여 잘못된 선택을 할지라도 &#39;잘되게 만들 수&#39; 있는 권한과 수단도 있었다. 품목과 사업자를 선정하고, 사업 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주고, 모자라는 역량은 특혜와 보&nbsp;조로 메워주었다. 뒷주머니를 차는 사업자에게서는 사업권을 회수 해버리고, 잘하는 사업자는 더 큰 사업권을 보장해줄 수 있는 당근과 채찍도 가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권력자들이 혹여 &#39;떡고물&#39;을 챙기더라도, 이는 그저 일을 되게 만드는 부수적인 필요악이거나 적어도 &#39;떡&#39; 만드는 일을 망치지는 않을 정도라고 항변했다. 이것이 한국 계획경제 운영의 틀이었다. 이런 식의 설명은 적어도 개발 경제 시대에 한국 경제의 발전 과정과 시장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의 실상을 설명하는 데 틀림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유별난 관치 경제의 틀에서 &#39;한강의 기적&#39;이라고까지 불린 눈부신 산업 화를 이룩했던 한국식의 발전 패러다임은 1960년대 초부터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을 때까지 4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nbsp;한국이 개발 연대의 계획경제체제에 변화를 시도하고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으로 볼 수 있다. 1960년대 초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정부는 1962년부터 &#39;경제개발 5개년 계획&#39;이라는 이름부터 &#39;계획경제&#39;임을 명시하고, 경제를 5&nbsp;년 단위로 운영하였다. 이 체제는 4차까지 이어져 1981년에 종료되 고, 1982년부터는 &#39;경제사회 발전 5개년 계획&#39;이라는 이름으로 7차 까지 지속되었고, 7차 계획 종료 이후에도 경제는 여전히 그 이전의 방식과 틀에 따라 운영되었다.&nbsp;계획경제의 마지막 단계이자 시장경제로의 전환의 일환으로 김영삼 정부는 출범과 함께 &#39;신경제 5개년 계획&#39;을 1993년부터 추진했지만 1996년에 조기 종료되었다. 하지만&nbsp;김영삼 정부의 5개년 계획은 몇 가지 의미 있는 개혁을 했다. 1993년에는 모든 금융거래에 실명을 의무화하는 &#39;금융실명제&#39;가 도입되었다. 1994년에는 계획경제의 상징이자 주무 부처였던 경제기획원이 폐지되고, 재무부와 통합되어 재정경제원으로 변신하였다&nbsp;계획경제에서 시장 경제로 전환된 것은 1995년이라 볼 수 있다. 1980년대 초에 부분적 인 시장 자유화 정책이 시행되었기에 일부 학자들은 이때부터 자유 으라는 상주의적인 시장경제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980년대의 자유화 정책은 국가를 시장으로 대체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 다. &#39; 이는 &#39;국가 개입의 새로운 형태일 뿐, 독점자본과 시장, 그리고 노동에 대한 국가의 주도성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nbsp;즉 1980년대 대내적 자유화 정책은 어디까지나 독점자본(재벌)의 합리화를 위한 국가 주도의 정책이었다.&#39;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계획경제 시절에는 정부가 음식 값, 목욕탕 요금, 여관 숙박료, 미용실 요금, 그리고 심지어는 다방 커피 값까지 결정했다. 예를 들어 목욕탕 요금을 업주 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은 1990년 9월이었다.그러나 나 자율화 이후에도 오랫동안 정부는 소위 &#39;행정지도&#39;라는 명목으로 목욕탕 요금을 규제해서 목욕탕 주인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아래 는 계획경제 시대에 정부가 어떻게 목욕탕 요금, 다방 커피 값, 그리 고 자장면 값을 통제했는가를 보여주는 기사를 발췌했다.&nbsp;창원과 마산시 등은 4일부터 시기동단속반을 구성하는 한편 읍면동 직원들까지 동원해 인상된 요금표를 철거하는 등 강제적으로 요금을 환원토록 하고 이에 불응할 경우 위생 검사와 세무조사, 경영사항제&nbsp;출명령권을 발동하겠다고 밝히고 있다......&middot;(중략)&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목욕탕)업주들 자율화됐는데도 해거 은 "지난 1990년 9월 이후 목욕 요금이 자유화됐는데도 정부가 공권력을 이용해 근거도 없는 단속을 하고 있다."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중략)&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도&nbsp;와 시군에서는 "(목욕탕)업소들의 사정을 이해하지만 연말 물가를 잡을 수 없다. "면서 "업소들의 호소에&nbsp;상부 지시로 단속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단속의 어려움을 밝혔다.&nbsp;1996년 11월 5일자 기사;&nbsp;서울시는 8일 최근 일부 대중음식점을 중심으로 음식 값 인상 움직임 을 보이자 강력한 행정지도를 통해 가격 인하를 유도키로 했다. 시는&nbsp;최근 일부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 가격을 1400원에서 1500원으로 100원 인상한 것을 비롯하여, 대중음식점들이 가격 인상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중략)&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음식점 가격 관리를 강화하고 가격을 인상한 업소에 대해서는 가격 인하를 유도키로 했다. 시는 이와 같은 조치에&nbsp;도 불구하고 업체들이 가격을 인하하지 않을 경우 위생 점검을 실시&nbsp;하거나 국세청에 세무조사를 의뢰할 방침이다.5&nbsp;(, 1991년 11월 8일자 기사)&nbsp;공무원들이 비록 자신들의 &#39;행정지도&#39;의 부당성을 알면서도 상부 지시 때문에 목욕탕 업주들에게 부당한 가격 인하 압력을 행사하 는 상황을 기사는 전하고 있다. 정부가 목욕탕 요금이나 자장면 값 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위생 검사와 세무조사를 압박 수단으로 업&nbsp;주들에게 가격을 내리게 했다는 것은 지금의 시장경제에서 보면 황&nbsp;당한 일이다.&nbsp;이러한 정부의 시장 개입 관행은 시장경제로 전환한 이후에도&nbsp;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이명박 정부의 &#39;MB 물가지수&#39;다. MB 물가지수는 쌀, 라면, 배추, 화장지와 같은 생활필 정권의 계획 수품의 가격을 정부가 관리하겠다고 이명박 정부 초에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MB 물가지수에 포함된 품목들의 가격은 오히려 소비 자물가지수보다 더 많이 올라서 아무런 실효성이 없었고,6 박근혜 정부에서 폐기되었다.&nbsp;한국이 계획경제 시대에 실시했던 &#39;경제개발 5개년 계획&#39;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경제 전문가 외에 일반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를 소개한다.&nbsp;먼저 &#39;경제개발 5개년 계획&#39;은 5&middot; 16 군사 쿠데타 이후에 박정희 정부가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 시작은 이승만 정부 였다. 이승만 정부는 1958년에 &#39;경제개발 3개년 계획(1960~1962)&#39;을 수립했고, 다음 해인 1960년 4월 15일에 국무회의에서 의결했으나&nbsp;4&middot;19 혁명으로 정권이 무너져서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nbsp;4&middot; 19 혁명 이후에 같은 해 8월 출범한 장 면 정부도 &#39;경제개발 5개년 계획&#39;을 수립해서 1961년 초부터 실행에 들어갔으나, 같은 해 5월 에 일어난 5 &middot; 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무너져서 이 계획은 중단되었 다.&#39; 따라서 5 &middot; 16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가 1962년에 &#39;제1차 경 제개발 5개년 계획&#39;을 시행한 것은 사실 이승만 정부, 그리고 뒤이은 장 면 정부의 5개년 계획에 바탕으로 두고 이어받은 것이다. 군사정부는 이런 종합 계획을 수립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정권의 계획을 일부 수정하여 발표했던 것이다.&nbsp;계획이 정치한 것도 아니었고 구체성도 부족했다. 하지만 계획서는 군부의 경제에 대한&nbsp;시각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당시 군사정부는 1962년 에서 &#39;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본 목표는 경제의 자립화와 공 업화를 위(해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강력한 계획성이 가미된 자유경제원칙의 테두리 안에서 경제성장을 극대화하여 자립 경제를 이룩하는 것이라고 밝&nbsp;히고 있다. 이때 방점은 군사정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미국에 대한 립서비스(lip-service)로 언급한 &#39;자유경제원칙&#39;이 아니라 &#39;강 력한 계획성&#39;이었다. 돌이켜보면 전쟁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1960년 대 초는 외국 원조로 근근이 먹고살던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경제정&nbsp;책의 목표가 &#39;자조, 자립, 자주&#39;를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원조 경제를 탈피하는 것이었겠는가. 여기에 자유로운 시장의 작동으로 효 율성을 통한 고도성장을 달성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이후 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군사정부에 이어서, 김영삼 정부에서 수립&nbsp;한 신경제 5개년 계획까지 30년 이상 지속되었다.&nbsp;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사실은 북한이 한국보다 앞서 경제개발 계획을 먼저 실시했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 이 한국보다 잘살았다는 것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직후인 &#39;1954년 부터 경제 부흥 3개년 계획, 1957년부터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행함&nbsp;으로써 성공적인 전후 복구를 달성하고 연평균 20% 안팎의 급속 한 경제성장&#39;을 이루었다.10 제1차 계획은 목표를 계획보다 일찍 달 성했고, 곧 이어서 실시된 중공업 육성에 초점을 맞춘 &#39;제1차 7개년 계획(1961~1967)&#39;은 계획보다 3년이 늦춰진 1970년에 완료되었다.11&nbsp;1961년부터 1970년까지의 기간 동안 북한의 공업은 연평균 12.8% 였다.&nbsp;반시장적인 재벌과 대기업&nbsp;필자는 한국이 시장경제를 &#39;제대로&#39;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규제나 신자유주의가 넘쳐나서가 아니라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공정한 경쟁조차 구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쟁이 만능도 아니며 모든 분야에서 무차별로 경쟁 원리가 적용되어서도 안 된다. 경쟁 시장의 원리가 적용되지 못하는 시장 실패 분야에 서는 국민의 대리인인 정부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부문이 아니라면 경쟁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며, 시장경제가 작동하려면 공정한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 누구에게나 경쟁에 참여할 기회가주어지고, 경쟁의 과정이 공정해야 한다. 경쟁의 출발선에서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서 시작할 수는 없지만 경쟁의 과정에서 각자의 노력과 창의력으로 결승점에 이르렀을 때 출발선에서와는 다르게 순위가 뒤바뀌는 역동성이 존재해야 한다. 또한 경쟁의 결과로 얻어진 가치가 경쟁에 참여하고 기여한 사람들에게 공정하고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원론적인 공정한 경쟁이 완벽하게 이뤄지는 시장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굳이 구체적인 통계와 분석을 보지 않더라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39;한국에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고 있는가&#39;라고 묻는다면 대다수 국민들의 답은 &#39;아니다&#39;이다.개천에서 용 나지 않고&#39;, &#39;티끌 모아 태산 되지 않는&#39; 것이 한국의 시장경제다. 경쟁은 기득권 세력들의 지배 논리로 이용되고 있다.출발선의 1등이 결승점에서의 1등이고, 한 번 1등이면 영원한 1등이 되는 것은 경쟁이 아니다. 한국이 시장경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걸림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재벌의 시장 지배와 정부의 관치, 경제다. 재벌들은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책적으로 육성되었고 경제 성장에 주요 수단이었으며 큰 기여를 했다. 지금도 한국 경제의 성장이 재벌의 성장 여부에 따라서 결정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그러한 재벌들이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할 책임이 있는 정부와 정치권이 오히려 공정한 경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아이러니다.재벌들은 하지 않는 사업이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그리고 각 사업 분야에서 재벌의 시장 지배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신생 기업이 재벌 기업이 하지 않은 사업을 찾아서 성장한 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이고, 중소기업이 재벌 기업이하고 있는 사업에 도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소수의 재벌 그룹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구조에서 소기업이 중기업으로, 중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기업 생태계가 한국에서 작동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중기업이나 중견기업마저도 대기업과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대기업의 하청기업으로서 성장하는 구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재벌 구조가 확고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과 같은 새로운 창업자의 성공 신화가 나오지 않고 있다.그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미국과 같이 시장경제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도 100대 부자의 70%가 당대의 창업자인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거꾸로 75%가 물려받은 부자라는 사실이다.&nbsp;또한 국가 경쟁력을 발표하는 WEF의 2013년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19위이지만, &#39;소수의 기업이 시장을 지 배하고 있는가&#39;라는 조사 항목에서는 99위로 소수 재벌 기업의 시 장 지배가 매우 심한 나라다.&nbsp;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시작한 나라로 지목받는 영국과 미국은 각각 6위와 9위이며, 북유럽의 독일과 스웨 덴도 각각 2위와 21위로 소수의 재벌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다른 세계 경쟁력 연보를 발표하는 IMD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 대상 59개 국가 중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효율성 차이에서 한국은 꼴찌인 59위를 기록 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이 가장 심한 나라다.82재벌 그룹들은 총수 가족이 소유한 회사와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하는 일을 빈번하게 자행하고, 일감 몰아주기와 같은 회사의 사업 기회조차 총수 가족이 독차지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상장 된 주식회사에서도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주주들이 회사 재산 을 개인 재산과 같이 제멋대로 가져가는 횡령이나 배임과 같은 범죄&bull;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재벌들의 장악하고 있는 한국의 시장에서 경쟁이란 새로운 승자를 만드는 순기능보다는 오히려 기득권을 강화해주는 역기능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장구조에서는 공정한 경쟁을 기대조차 못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현대차는 적대적 M&A 걱정이 없는가?|&nbsp;외국인 소유 지분이 높아서 적대적 인수 &middot; 합병을 우려한다면, 이는&nbsp;삼성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가총액 상위 20개 기업 중에서 외 국인 지분이 이미 50%를 넘는 기업이 6개나 되고, 삼성전자와 같이 40%를 넘는 회사도 4개나 된다. 45 시가총액 상위 기업에는 현대자&nbsp;동차, 포스코, 신한금융지주(신한은행의 지주회사)들이 포함되어 있는 데, 이러한 기업들도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한국 경제에 대단히 중 요한 회사들이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소유 지분이 60%를 넘어서서&nbsp;적대적 인수&middot;합병 논란이 시작되었던 2004년에 현대자동차의 외국 인 지분은 57%를 넘었고, 포스코와 신한지주의 외국인 지분은 삼성전자보다 훨씬 높은 71%와 66%였다.46 이 중에서도 포스코는 외국인 소유 지분이 70%를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과 같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주주도 없다. 또한 포스코&nbsp;시가총액은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14% 정도이기 때문에 적대적의 데 동원해야 할 자금의 규모도 훨씬 작다.47 이러한 인수 합병 하는 상황에 비춰볼 때 만약 외국인 주주들이 적대적 인수&middot;합병을 시도&nbsp;한다면 포스코가 삼성전자보다 훨씬 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nbsp;이다.&nbsp;한국 3대 민간은행인 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의 경우도 찬가지다. 세 은행의 지주회사들은 모두 외국인 주주들의 소유 지분이 삼성전자보다 훨씬 높다. 국민은행을 100% 소유하고 있는 KB 금융지주의 지분을 5% 이상 가진 주주는 9.96%를 보유한 국민연금 하나뿐이다.48 그러나 국민연금은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재무적 투자자이기 때문에 국민은행에는 대주주의 &#39;경영권&#39;이 존재하지 않 는다. 그리고 KB금융지주는 외국인 주주들의 지분이 삼성전자의 49.7%보다 훨씬 높은 63.5%이고, 한 번도 외국인 지분이 50% 이하 로 내려간 적이 없다.4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최대 은행인 국민은 행을 외국인 주주가 인수&middot; 합병한다거나 경영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우려가 없다. 신한금융지주도 외국인 지분이 66%까지 올라갔고 짧 은 몇 달을 제외하고는 항시 50% 이상을 유지했다. 하나금융지주 의 외국인 지분은 무려 81%에까지 이르렀고 지속적으로 60% 이상 을 유지했다.50 3대 민간은행의 지주회사들은 삼성전자와 비교해서 외국인 지분이 훨씬 높을 뿐만 아니라 포스코와 마찬가지로 경영권&nbsp;을 가진 대주주도 없고 시가총액도 삼성전자의 5~10% 수준에 불과 하다. 3대 민간은행에는 5% 이상을 소유한 외국인 주주들이 있지만 삼성전자는 없다.51 은행의 경우에는 대주주가 되기 위해서는 정부 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지만, 은행의 대주주가 삼&nbsp;되 는 자격 요건을 갖춘 외국인 주주라면 정부가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다. 따라서 단순히 외국인 지분이 높다는 사실 때문에 외국인 주주 들에 의한 적대적 인수&middot;합병의 위험이 있다면 삼성전자보다 민간은행들의 위험이 훨씬 더 크다.&nbsp;삼성전자보다 외국인 지분이 높을 뿐 아니라 대주주도 없고 시가총액도 작은 포스코나 3대 민간은행들, 그리고 현대자동차에 대 정 해서는 외국인 주주에 의한 적대적 인수&middot; 합병 논란이 없었는데 왜 주 유독 삼성전자에 대해서만 적대적 인수&middot; 합병 논란이 있었던 것일 까? 삼성전자 외국인 주주와 현대자동차 및 포스코의 외국인 주주 들이 특별하게 다른 점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삼성전자 외국인 주주들이 현대자동차와 포스코의 외국인 주주들과는 다르게 적대 적 인수&middot; 합병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만한 차이나 근거&nbsp;도 없었다.3대 민간은행의 외국인 주주들과 비교해서도 특별히 삼성전자 외국인 주주들이 적대적 인수&middot; 합병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 다고 판단할 만한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삼성전자에 대해서만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middot; 합병 논란이 지속되어 온이&nbsp;유가 무엇일까? 현대자동차나 포스코가 삼성전자보다 규모가 작은 회사이니 외국인이 경영권을 가져도 괜찮고, 삼성전자만은 절대로&nbsp;안 된다는 의미일까? 또는 한국 3대 민간은행의 경영권을 모두 외국 인이 장악한다 해도 괜찮다는 의미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삼성&nbsp;전자가 한국 경제에 소중한 만큼이나 현대차, 포스코 그리고 3대 은&nbsp;행들도 마찬가지로 소중한 기업들이다.삼성전자에 대해서만 적대적 인수 &middot; 합병의 논란이 있었던 것은&nbsp;삼성그룹이 &#39;자초한 일이었다. 삼성그룹은 2004년 적대적 인수&middot;합 병 가능 성과 위험성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공정거래위원회를 방문해서 그러한 우려를 직접 전달하고 설명하기까지 했다.53 실제&nbsp;로 삼성전자 적대적 인수 &middot; 합병을 시도한 주주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려지거나 보도된 바가 없고, 당시의 외국인 소유 지분 구조로 봐 서 그런 시도를 할 만한 역량이 있는 주주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삼 성전자는 스스로 적대적 인수 합병 논란을 키운 것일까? 그 해답은&nbsp;삼성그룹의 소유 지배 구조에 있었다.&nbsp;물고 물리는 돌려 막기&nbsp;일반 사람들에게 삼성전자의 &#39;오너(owner)&#39;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 부분은 당연히 이건희 회장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희가 소유한 지분은 오너라고 불릴 만한 수준이 전혀 아니다. 이건희는 삼 성전자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지만 실제로 1대 주주도 아니고 자&nbsp;신이 소유한 지분은 극히 적은 소액주주에 불과하다.54 이건희는 자신과 가족이 소유한 지분이 아니라 계열사가 소유한 지분으로 경영 권을 확보하고 있다. 적대적 인수 &middot; 합병 논란이 제기된 2004년에 계 열사들이 소유한 지분은 12.72%이었고 이건희 가족과 임원 등의 특 수 관계자들이 소유한 지분을 다 합하면 16.05%였다. 이 중에서 가 장 많은 지분을 소유한 삼성전자의 1대 주주는 이건희가 아니라 7.23%를 보유한 삼성생명이었다.&nbsp;그런데 2004년 당시에 삼성생명의 소유 구조를 보면 1대 주주 는 비상장회사인 삼성에버랜드로 19.34%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전 희의 소유 지분은 4.54%에 불과했다. 56 그리고 삼성생명의 1대 주주인 삼성에버랜드의 소유 구조를 보면 이건희가 3.7%, 아들인 이재용이 25.1%, 세 명의 딸들이 25.1%를 소유해서 가족들의 지분합계가 53.9%인 소유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계열사들의 출자 구조에서 최종 고리에 있는 삼성에버랜드의 가족 지분이 50%를 넘어서는 방법으로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1대 주주로서만이 아니라 삼성그룹의 다른 주요 계열사의 지분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데, 삼성생명이지 분을 소유한 삼성물산, 삼성카드, 삼성화재 등의 계열사들은 다시다른 계열사들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어서 삼성생명은 삼성 계열사들의 순환 출자 구조의 핵심적 연결 고리다. 삼성에버랜드는 삼성생 명의 1대 주주이고,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1대 주주이고, 삼성전자 는 삼성카드의 1대 주주이고, 다시 삼성카드는 삼성에버랜드의 1대주주다. 즉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돌려 막기 &#39;순환 출자 구조&#39;가 이건희 가족의 경영 &bull;권을 확보하는 핵심적 연계 고리다. 그뿐만 아니라 삼성생명은 삼성물산의 지분을 소유하고,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의 지분을 소유하고,삼성전자는 삼성카드의 지분을 소유하고, 삼성카드는 삼성에버랜드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어서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물산- 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또 다른 순환 출자구조가 있다. 그리고 또 삼성생명은 삼성카드의 지분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바로 이어&bull;취막기식 순환 출자가 삼성그룹의 자체 보고에서는 76개 있는 것으치는 또 다른 순환 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계열사 간의 이러한 돌&bull;로 밝혔지만,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분석에 의하면 무려 2555개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57이같이 여러 개의 복합적인 순환 출자 구조에서 삼성생명은 가창핵심적인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는 아킬레스건(achillest)과 같은 &bull;존재다. 그런데 사건이 생겼다. 2004년 당시에 삼성생명이 지분을 소 &bull;유한 계열사들에 대해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에 문제가 발생했던것이다. 당시에 공정거래위원회는 재벌 그룹 내에서 자신의 금융 계열사가 소유한 다른 계열사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30%에서 15%로 낮추는 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한 법 개정의 취 지는 재벌 그룹들이 고객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금융 계열사를 이용해서 총수의 경영권을 확보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즉 금융회사는 자기자본이 아니라 고객의 돈으로 다른 회사의 주식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고객이 맡긴 돈을 투자한다는 명분으로 자기 계열사 ・들의 주식을 사고 그 주식에 해당하는 만큼 의결권을 행사한다면,이는 고객 돈으로 경영권을 확보해주는 형국이 되기 때문이다.그런데 삼성생명과 이건희 등의 특수 관계인이 당시에 보유한 삼성전자의 지분 합계가 16.05%이었으니 법이 개정되면 이 중에서 일부의 지분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58 삼성전자 &bull;판이 아니라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등의 삼성그룹의 금융계한을 받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도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열사들이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다른 계열사들에 대한 의결권도&nbsp;재와 같은 금융 계열사를 통해서 삼성전자의 지분을 늘려간다고 해 도 의결권을 추가로 확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삼성그룹은 이러한 공정거래법의 개정을 반대하기 위해서 스스로 삼성전자가 외 국인 주주들에 의해서 적대적 인수&middot;합병 될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삼성그룹은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물산 3개 회사를 원고로 2005년 6월 공정거래법 11조의 의결권 제한이 위헌이라는 취지로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냈다가 나중에 취소하는 소동까지 벌였다.당시에 외국인 지분이 높았던 현대자동차나 포스코 등의 다른 회사들은 삼성전자와는 달리 금융 계열사를 통해서 소유한 지분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공정거래법이 개정된다고 해도 이 회사의 의결 권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다른 재벌 그룹들의 경우에도 금융 계열사를 통해서 총수의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 거래법의 개정이 전혀 영향이 없거나 있는 경우에도 그 영향이 미미 했다.60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으면 외국인 주주에 의해서 적대적 인수&middot;합병 될 수 있다는 삼성그룹의 주장은 다른 재벌들이나 기업들과는 별 관계가 없는 삼성그룹만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뿐만 아니 &bull;라 일부 친재벌 언론과 일부 정치권까지 가세해서 마치 외국인 주주들이 한국 기업들을 적대적 인수&middot;합병 할 것처럼 호들갑 떨었다. 일부 언론은 삼성전자 외국인 주주 중에서 시티은행(Citibank)이 11.8% 를 소유하고 있어서 그럴 위험이 더 크다는 엉터리 기사를 내기도 했 다.&nbsp;]]></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Mon, 03 Jun 2024 22:25:1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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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기업경제학</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26</link>
			<description><![CDATA[기업경제학. 임상일. 자유아카데미. 2023. 9. 15.&nbsp;1. 대한민국 경제의 위상2019년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약 1조 6,463억 달러로 세계 11대 경제대국이다.&#39; 일인당 국내총생산 34,980달러로 세계 29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 5천만 명 이상 되는 나라 중에서 일인당 국내총생산이 3만 달러를 넘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7개국에 불과하다. 우리 앞에는 세계 최강국 미국, 세계 대전을 2번이나 일으켰던 독일,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까지도 영토를 넓혔던 일본,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유럽의 맹주 프랑스, 로마 제국의 이탈리아가 있을 뿐이다. 무적함대로 세계를 호령 (號)하던 스페인도 이 대열에 오르지 못하였다. 일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 되 던 시절에 태어난 저자의 눈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고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다.&nbsp;을 통해 우리나라의 위상을 알아보자. 무역액(수출액과 수입액의 합)은 1 조 달러를 넘어 세계 9대 교역국이다.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발전하였 으며 유엔 무역 개발 회의(國際聯合貿易開發會議,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가 1964년 설립된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 그룹 으로 지위를 변경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세계 부국 모임인 G-7 회의에 게스트로 초대되는 지위에까지 올랐다. 실업률도 물가상승률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고 인터넷 이용률은 95.9%로 최상위권이다. 좀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 보면 반도체(메모리 부분), 디스플레이(모니터, TV), 조선 부문, 리튬이온배터리, 핸드폰 생산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으며 지하철 길이에서 세계 4위, 자동차(생산량 기준)에서는 세계 5위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산업 재해 수를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특히 노벨상 수상자 수가 아쉬운데, 인류의 미래를 위해 과학과 문화면에서 더 기여하는 국가로&nbsp;발전할 필요가 있다.&nbsp;먼저 인간의 생로병사와 연계해서 국가의 기능을 생각해 보자. 영아 사망률, 식자율과 더불어 사회의 문명도를 나타내는 기본 척도인 기대수명을 보면 82.7세 (남자: 79.7세, 여자: 85.7세)로 초고령화 사회에 이르렀다. 세종대왕이 53세에 별세하셨고 조선 시대 왕의 평균 수명이 47세였음을 상기하면 얼마나 놀라운 발전인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이와 같은 삶의 질 향상에는 의료와 교육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 향상된 교육과 의료는 어디에서 왔는가? 생산(生産, production)이 있어야 교육과 의료에 대한지원이 가능하다. 생산이야말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출발점이다. 좀 더 확대해서 보면 생산, 분배, 소비라는 경제활동이 인간의 물질적&middot;정신적 능력을 확대시킨 결과삶의 질이 크게 향상된 것이다)]]></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Sun, 02 Jun 2024 20:37:0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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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상업의 역사2 : 광복과 한국전쟁의 혼란속에서 움튼 산업.</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25</link>
			<description><![CDATA[상업의 역사2 : 광복과 한국전쟁의 혼란속에서 움튼 산업. 박상하. 주류성 출판사. 2024. 1. 23.&nbsp;(기업경제학. 임상일. 자유아카데미. 2023. 9. 15.국가의 기능, 경제발전 그리고 기업의 역할먼저 인간의 생로병사와 연계해서 국가의 기능을 생각해 보자. 영아 사망률, 식자율과 더불어 사회의 문명도를 나타내는 기본 척도인 기대수명을 보면 82.7세 (남자: 79.7세, 여자: 85.7세)로 초고령화 사회에 이르렀다. 세종대왕이 53세에 별세하셨고 조선 시대 왕의 평균 수명이 47세였음을 상기하면 얼마나 놀라운 발전인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이와 같은 삶의 질 향상에는 교육과 의료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 향상된 교육과 의료는 어디에서 왔는가? 생산(生産, production)이 있어야 교육과 의료에 대한지원이 가능하다. 생산이야말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출발점이다. 좀 더 확대해서 보면 생산, 분배, 소비라는 경제활동이 인간의 물질적&middot;정신적 능력을 확대시킨 결과삶의 질이 크게 향상된 것이다)&nbsp;8&middot;15해방(1945)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곧바로 뒤따라 이어진 6&middot;25전쟁(1950)은 상계의 거의 모든 것을 파괴시켰다. 폐허와 공허의 잿 더미만이 눈앞에 남은 전부였다.그러나 이 같은 전환기의 혼란은 또다시 상계에 찾아온 &#39;절호의 기회&#39;이기도 했다. 한때 전국을 황금빛 열풍으로 물들였던 (1930년대), 바로 그 황금광 노다지의 꿈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굳이 다른 걸 꼽는다면 노다지의 꿈을 찾아 아무나 무작정 뛰어든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혹은 해방 이후에 창업을 했거나, 그즈음에 창업한 젊고 새로운 기업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을 따름이다.&nbsp;일제강점기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상계의 유력 기업들이 해방 이후 반민특위의 숙청 작업으로 비틀거리고 있을 때, 젊고 새로운 기업들이 혜성처럼 등장해서 그 자리를 재빨리 메워나갔다. 일본인들이 빠져나가면서 무주공산이 된 적산敵産 기업에 손쉽게 입성할 수 있었다. 일찍이 춘원 이광수가 감지하고 예언했던 바로 그 &#39;대군&#39;이 몰려온 것이다.서울 잠실 지구 공유 수면을 매립하여 참실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고 있는 삼부토건의 공사 현장. 삼부토건은 극동건설 등 과 함께 자유당의 &#39;건설 5인조&#39;로 불리면서정부 발주 공사를 목점하다시피 했다.이들 5대 건설업체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자유당의 정치자금원 중 비중이 큰 것이 건설업이었는데, 당시 건설업계의 관행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예를 들어 특정 건설업체가 덩치가 큰 정부 발주 공사를 수주할 경우 공사 가격의 30%는 미리 공제되어 자유당의 정치자금으로 납부되고, 20%는 (건설업체들 끼리)이익금으로 분배한 후, 나지 50%만 가지고 공사를 했다는 말이, 건설업자들 간에 회자될 정도로 건설업계의 성패 여부는 &#39;정경 고리의 견고성&#39;에 있었다".&nbsp;이같이 해방 직후 거저 줍다시피 적산 기업들을 불하받은데 이어, 전쟁 이후 해외 원조자금으로 이루어진 군납과 관납을 비롯한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화는 그들에게 또 다시없는 황금광의 노다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절호의 기회를 통해서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낯선 이름의벼락 부호들이, 새로운 기업집단이 돌연 상계에 등장케 되었다.서울 지하철 충무로역 매일경제신문사 맞은편에 서있는 상계 순위 2위의 옛 삼호그룹의 본사 사옥.&nbsp;최근까지 반세기 넘도록 버티고 있었으나, 얼마 전에 헐리면서 지금은 새 빌딩을 한창 짓고 있다.&nbsp;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 그동안 엎치락뒤치락 하던 상계의 순위도 어느 정도 고정될 만큼 안 정되어 갔다.&nbsp;때문에 4.19혁명(1960) 이후 부정축재자 처리 문제가 연일 신문 지상&nbsp;에 오르내릴 때 사법 당국이 23명의 명단을 발표한 일이 있다. 삼성물산 이병철, 삼호 정재호, 개풍 이정림, 대한전선 설경동, 락희 구인회, 동양시멘트 이양구, 극동해운 남궁련, 한국유리 최태섭, 동립산업 함창희, 태창방직 백남일 등이다. 이들이 곧 당시 국내 10대 그룹의 순위이기도 했던 것이다.&nbsp;조선상계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이자 「상계의 역사」 100년에서 맨 처음 그룹의 반열에 올라 1950년대의 정상이었던, 태창그룹 백낙승의 후계자 백남일이 가까스로 순위 10위에 랭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부산 피난 시절 미군의 건설 수주를 독점하면서 일약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현대의 정주영이 아직은 10위권 안에는 들지 못하고 있는 건 눈여겨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어쨌든 1950~60년대 10대 그룹 가운데 상계의 순위 1위는 단연 이병철의 삼성이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부산 피난 시절 물자가 절대 부족하다는데 착안하여 국내에서 고철 따위를 수집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대신, 홍콩으로부터 설탕과 비료를 수입하면서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그러나 이병철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다시금 변화를 꾀했다. 사업의 다각화였다.6.25전쟁(1950) 이후 정부는 원조 자금과 물자 확보를 민생 안정과 전후 복구에 우선적으로 배정했다. 이병철은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시기상조라는 주위의 반대에도 제조를 결정케 된다.우선 공장 설립에 필요한 외화 18만 달러를 정부 협조로 특별 대출받았다. 나머지 2천만환도 상공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사업 자금을 간단히 확보하면서, 첫 번째 제조 공장인 제일제당을 (1953) 창업할 수 있었다.이후 식품 중심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동성물산의 통조림공장을 인수한데 이어, 제분공장을 건설하고 제분업에도 새로이 진입했다(1957). 그 뿐 아니라 전쟁 이후 긴급한 의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정부와 원조당국의 지원을 받아 제일모직까지 창업하면서(1954), 기존의 삼성물산&middot;제일제당&middot;제일모직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여 향후 도약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더욱이 시중은행의 민영화 쟁탈전에서 거둔 승전은 컸다. 이른바 모두 일본&nbsp;2위는 정재호의 삼호그룹이었다.&nbsp;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대구 시내로 나가 봇짐장수를 시작으로, 전쟁 직전에서울는 3,600 규모의 중소기업 삼호방직을 창업할 수 있었다. 전쟁은 그에게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 대부분의 방직공장이 파괴되고 말았으나, 대구에 있던 그의 삼호방직만은 무사했다. 다른 방직공장들이 가동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삼호방직은 때아닌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더구나 정계의 실력자들이 대구로, 부산으로 줄줄이 피난을 내려왔다. 정재호는 알게 모르게 군력과 가까워졌고, 마침내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에게 줄이 닿았다. 이때부터 정재호에게 거칠 것이란 없었다. 삼호방직에 이어 삼호무역을 창업하면서 떼돈을 벌었다.&nbsp;일찍 부산의 조선방직을 인수한데 이어, 대전방직을 복구하고 삼호방직을 크게 확장시켰다. 짧은 기간에 방직왕으로까지 등극케 된다.그뿐 아니라 전후 시중은행 민영화 때 조선저축은행(지금의 SC제일은행) 까지 손에 넣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른바 금융 콘체른까지 완성지음 으로써 삼성그룹에 이은 상계 2위의 삼호그룹을 완성케 된 것이다.상계의 순위 3위는 이정림의 개풍그룹이었다.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일컬어지는 그는, 전라도 여수에서 천일고무를 경영하던 김영준의 대리인이었다. 한데 여순반란사건(1948) 때 김영준이 학살되어 죽자 동향 후배인 이회림과 합자하여 같은 해 개풍상사를 창업하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nbsp;중석(텅스텐 광석)의 부산물인 창연을 일본에 수출하고, 생필품 따 위를 수입하면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서울수복 이후에는 제빙공장인 호양산업과 대한탄광을 창업한데 이어, 전후 원조자금으로 건설하던 문경 시멘트공장을 인수하여 대한양회를 설립했다. 그뿐 아니라 대한유리의 최태섭, 동양시멘트의 이양구, 동양맥주의 박두병, 건설실업의 김광균 등의 지원을 얻어 서울은행을 창업하면서 자력으로 금융 콘체른까지 완결 지었다.상계의 순위 4위 그룹은 설경동의 대한전선이었다. 설경동은 부산 피난 시절 서울에서 벌이던 사업을 그대로 지속했다. 대한산업과 원동흥업을 경영하면서 일본에 중석 따위를 수출하고, 밀가루와 비료와 같은부족한 생필품을 들여와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그러다 전후 원조 자금이 기업에 쏟아질 때 설경동은 재빨리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진화를 꾀하는데 성공한다. 대한방직 (1953) 창업을&nbsp;럭키치약 럭키비누 플라스틱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구인회는 뒤이어 럭키치약, 럭키비누까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상계최초로 전자산업에까지 진출하게 된다.&nbsp;이어 화장품 용기를 만들기 위해 다시 손을 댄 플라스틱사업 역시 럭키였다.서울로 무대를 옮겨 사업을 하던 숱한 기업들이 갑작스런 전쟁으로&nbsp;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채 빈털터리로 피난을 내려와 그저 하루 동안의 호구지책을 마련하기 위해 국제시장의 골목길을 기웃거리고 있을때, 그는 플라스틱 사출기 2대를 들여놓고 한창 성업 중이었다. 그만큼 구인회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행운이 한꺼번에 따라주고 있었다. 구인회의 락희그룹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nbsp;구인회는 플라스틱 사출기로 화장품 용기에서부터 머리빗, 비누곽, 바가지 등 각종 생활용품을 만들어내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돈방석에 앉았다. 떼돈을 벌어들이자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진 틈을 타&nbsp;부산 연지동에 세워진 금성사 공장과 금성사에서 만들어낸 라디오 광고, 금성사는 &#39;골드스타&#39; 브랜드로 미국 아이젠버그사에 처음으로 라디오 62대를 수출하면서 최초의 역사를써나간다(1962). 이 뒤이어 치약 제조에 나섰는데, 치약사업 역시 공전의 히트였다. 락희화학의 치약사업은 기존의 경쟁자들은 물론 외제까지 깡그리 몰아내는 기념비적인 성과를 거두면서 단숨에 그룹을 구축하는 기염을 토했다.&nbsp;이처럼 플라스틱과 럭키치약으로 이미 광범위한 내수시장을 석권한 구인회는, 이런 성공을 발판삼아 손쉽게 영역을 넓혀나간다. 다시 비누메이커인 락희유지를 설립한데 이어, 상계 최초로 전자산업에(1959) 까&bull;지 손을 뻗쳤다. 금성사에서 &#39;골드스타&#39; 브랜드로 라디오를 만들어내기시작하였을 때 구인회의 락희그룹은 어느새 상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드는 강자로 성큼 발돋음해 있었다.구인회의 럭키는 거기서 그치지 않 았다. 플라스틱으로 큰 성공을 거둔 락희화학는 반도상사를 창업하여 무역으로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다른 기업가들이 저마다 무역업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제조업에 손을 댄 것과 달리, 그는 거꾸로 제조업에서 자본을 축적하 여 무역업으로 진출한 케이스였다.이양구는 전쟁이 끝나자 제일제당이 인수한 판매권을 이용하여 동양제과를 인수하고 나섰다. 동양제과가 어느 정도 정상화되자 이번에는 제일실업을&nbsp;창업하여 무역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제일실업마저 자리를 잡아나갔다.&nbsp;다시금 동양시멘트(1957)마저 인수하면서 몸집을 자꾸만 불려나갔다.&nbsp;동양시멘트는 원래 일본의 소노다시멘트 삼척공장으로 건립되었던 개풍 것으로, 해방 이후 체신부 차관을 지낸 강직순의 소유였다. 한데 경영이 대한진 부실했다. 동양제당의 이름으로 이병철&middot;이양구&middot;배동항 등이 합자 인수 락희&nbsp;했으나, 이양구가 제일실업을 정리하면서 단독으로 인수할 수 있었다.&nbsp;어떻게 해서 소수의 개인이 한국경제 전체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학계 및 언론계에서 광범위하게 일치되는 견해는 "정치적 유대political "connection"라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의 대표적인 예로서 김경동 교수에 의하면 그룹 총수는 "주로 투기, 가격 조작, 탈세 및 누적된 인플레이션의 이용 등과 같은 비합리적 과정을 통하여 자본을 축적한 &#39;정치적 자(본가political capitalists&#39; 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치적 기부의 대가로 경제적 특혜를 얻기 위해 정치적 유대를 이용했다&rdquo;라고 보고 있다"?.이 무렵에 급부상한 그룹들은 기업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정권의 힘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기업의 내부적인 자본 축적을 통한 성장이라기보다는 외부 의존적이고, 상업자본주의적인 유통상의 이익을 통해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졌다. 또한 기업의 경영 관리 풍토가 혁신이나 기술개발보다는 경영의 외적인 능력에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경영 풍토가 조성되었다. 정치와 유착된 상태에서 기업이 운영됨으로써 폐쇄적인 가족경영 체제가 확립되어 배타성을 띠게 되었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 수행 이나 국민 경제적 기능은 도외시 되었다",&nbsp;두 분의 지적은 핵심을 찌른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보여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것이 전부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소수의 선택된 사실만이 살아남은 100년 동안의 개척, &#39;상계의 역사&#39;를 통해 광범위하게 일치되는 견해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 되묻 고 싶다.&nbsp;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는 돕는 것과 같이 천우의 기회&nbsp;미리 준비되어 역량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간절히 몸부림칠 때만 책을 잇는 일 플레이&nbsp;은 모두 일본 적 자 이 보이는 세계가 아닐는지. 학계에서 이&nbsp;적인 것이었 그들 예컨대 해방 이후 거저 줍다시피한 적산 기업의 불하로 하루아침에 후세대들의 한일 양국&nbsp;의 중&middot;고등&nbsp;이용 몸집을 키우고 나자, 곧바로 이어진 전쟁 이후 외국의 원조자금으로 건 료들이 작&nbsp;설한 수입대체 산업 중심의 공업화로 다시 몸집을 크게 불린데 이어, 또 에 소재한&nbsp;서 느꼈던 을 수 없었 다시 몸집을 거대하게 불려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목전에 기다리 고 있었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4.19혁명(1960)으로 무너지고 장면&nbsp;정권이 들어섰으나, 곧바로 이듬해 5.16쿠데타가 일어나 육군 소장 박정&nbsp;희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또 다른 격변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렇잖아도 되고 있는&nbsp;관련 정 상당 수준의 &#39;정치적 유대&#39;와 &#39;상업주의적 유통 이윤에 주력&#39;했던 자신 한다. 이&nbsp;스캔, 인 거의&nbsp;들의 상공적 경험을 바탕으로 의기투합하여, 이제는 본격적인 고공으로 는지 알&nbsp;않은 독 비상할 수 있는 도약의 그날을 저마다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 같은 는 분들&nbsp;털고고 풍운의 시대를 통과해온 것이라고 두 분 지적의 말미에 덧붙이고 싶다. 의 과거&nbsp;출발 요컨대 &#39;60년대 이후 새로운 시대 곧 본격적인 경제개발의 시대를 어기&nbsp;차게 열어나가기에 이른 것이다.&nbsp;]]></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Sun, 02 Jun 2024 20:33:1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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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이봐 해봤어? 도전정신.</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24</link>
			<description><![CDATA[이봐 해봤어? 도전정신. 박정웅. 행복에너지. 2022. 10. 10.&nbsp;정주영 회장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인물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창의적 상상력 결정적인 순간에 상식과 고정관념을 떨쳐버리고 뛰어넘어 불확실한 미래에 뛰어드는 도전과 모험을 가능케 했다.&nbsp;내수시장 기반도 기술기반도 없는 개발도상국에서 선례가 없는 자동차 독자 개발이 그랬고, 맨손으로 대형 조선소 건립과 수출 수주,&nbsp;경험과 기술이 없는 상태에서 뛰어든 중동건설 시장, 세상에서 그 자 신 한 사람을 제외하고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 없었던 88서울 올림픽&nbsp;유치 성공 등이 그 예다. 그리고 그는 결정적인 시기에 시대를 뛰어넘는 이러한 업적을 통해서 오늘날 한국의 위상을 세계적 공업선진국으로 올려놓았다. 그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일생의 업적이기도 힘든 일 을, 놀라운 추진력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세기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 커 교수도 생전에 정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불확실성이라는 위험 저편 아득히 존재하는 가능성을 갈파해내고 이를 리더십과 추진력으로 성취해 내는" 그의 탁월한 기업가 정신을 인정했다. 그와 동시대를 산 세계적인 기업들이 많이 회자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오래 축적된 기술과 숙련된 노동인력 기반, 든든한 내수시장, 그리고 자본이 있었다. 그러나 정 회장에게는 이런 것들이 전무했다.&nbsp;그가 이러한 도전의 모험을 할때 업계와 세인들은 정 회장이 초등 학교만 다녀서 무식해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알고 저렇게 무모한 시도를 한다고 했다.&nbsp;그들은 그 무모한 실패의 결과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과 국제 신 뢰도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었다. 그만큼 정 회장의 한국 경제의 장래 와 사업을 내다보는 상상력이 시대를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nbsp;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정 회장의 이러한 시공 을 뛰어넘는 창의적 발상력은 역설적으로 그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래서 지식이라는 틀에 갇 히지 않고 창의력이 한껏 발휘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다. 앞&nbsp;서 열거한 것에 더하여 아산만 물막이 공사를 예로 들 수 있다. 물막이 공사는 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방조제 둑 사이가 좁아질수록 그 사 이를 드나드는 물결의 힘이 가속적으로 커지기 때문에 대단한 위험하다.&nbsp;애플의 2022년 9월 기준 싯가 총액이 약 3550조 원이러고 한다. 한편 같은 시기 세계 10대 경제권이라는 우리나라의 코스피와 코스닥 상장 기업의 싯가 총액을 모두 합한 것이 2500조 원이라고 한다. 주가는 현 재의 기업 가치 못지않게 미래 성장 잠재력의 가치이기도 하다. 디지 털 경제의 위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극적으로 말해주고 있다.&nbsp;양자 컴퓨팅, 인공지능, 메타버스 등 새로운 디지털 진화는 고정관념을 과감히 탈피하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비롯된다.&nbsp;모든 변화와 혁신은 불편할 뿐 아니라 불안하다. 그래서 혁신에는 과감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도전과 혁신을 두려워하는 집단이나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시대는 변했어도 기본은 같다. "이봐, 해봤어?"&nbsp;정주영 회장은 참모들에게 끊임없이 도전과 혁신을 요구하며 한 시대 를 이끌며 불가능해 보였던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 이 갖는 무한한 힘에 대한 신봉자였으며 철저히 이를 실천에 옮겼다. 정주영 회장의 정신은 대 전환기를 맞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도&nbsp;여전히 주효한 것이다. 그의 정신을 지금 되새겨보는 이유다."자네 혹시 현대 자동차 주식 가지고 있는 것 있으면 빨리 처분해. 선대 정주영 회장이니까 지금까지 해냈지만 앞으로는 어림없어. 첫째는 아무리 현대라도 엄청난 자본이 안 될 거고, 둘째는 막강한 선진국 자동차 회사의 기술력과 디자인, 그리고 마케팅 분야의 도전이 엄청날 거야."&nbsp;이 말을 한 사람은 선대 정주영 회장과 가까이 지냈고 후에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한 인사가 현대자동차가 정몽구 회장 시대를 맞았을 때 내게 해준 진지한 조언이었다. 능숙치 않은 말씨와 사람들 앞에 서기를 싫어하는 정몽구 회장의 특성 때문에 이러한 추측은 세인들사이에 더욱 확산되었다.그러나 정몽구 회장은 그 나름대로 특유의 뚝심과 경영관, &#39;이봐, 해봤어?&#39; 도전정신의 DNA를 승계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었다.&nbsp;"10년 & 10만 마일 무상수리 보장." 2000년 1월 자동차 본고장 미국 디트로이트 자동차 전시장 현대관 상단에 크게 써서 내걸린 표어였다. 자동차 역사에서 사상 초유의 선언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대체&nbsp;적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현대가 가격을 내려도 차가 안 팔리&nbsp;니까 최후의 수단을 쓰는 것 같은데 결국 저렇게 해서 망하는구나. 그 엄청난 수리비용 부담 때문에 결국 망할 거야. 아니면 소비자 상대 사 기일 거야. "와 같았다. 경쟁사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까지 내로라하는 1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세계 자동차 회사들도 감히 5년 이상 무상 수리 보장을 시도해 보지 못했던 터였다.&nbsp;정몽구 회장의 이러한 시도는 현대자동차 내부에서도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을 맞추기 위한 기술력도 문제였지만 그 과정에 받을 엄청난 스트레스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의 그런 결단은 스스로에게 건 구속과 도전의 결심이었다.&nbsp;가야 할 길이면 일단 결심을 하고 길을 찾아보고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나가자는 &#39;이봐, 해봤어?" 도전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엄청난 일을 해냈다. 이런 과정에 현대 자동차의 기술과 디자 인 팀들은 피나는 노력으로 정몽구 회장의 의지를 뒷받침해 주었다.&nbsp;그는 기술과 디자인 분야의 핵심 인력을 개별적으로 포상 격려하는 배려를 잊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39;사건&#39; 이후 자동차 소비자들의 현대자동차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 자동차에게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nbsp;보다 치터, 구동BMW사에서 디자인 혁신을 일으켜 대성공을 거두게 한 디자이너&nbsp;크리스 뱅글을 2000년대 중반쯤 만난 자리에서 필자가 물었다. "당신 안전 이 현대 자동차 공장을 돌아보았는데 실제로 기술이나 디자인 수준 수소에 대해서 가감없이 평가해주기 바란다. 이에 대해 그는 "솔직히 납 득이 안 간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역사를 가진 현대자동차의 기술과 디자인의 수준이 여기까지 왔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nbsp;어쩌면 그가 이해하지 못한 그것이 정몽구 회장의 그런 뚝심의 일면 인지 모르겠다.&nbsp;1998년 IMF 사태로 한국은 혹독한 시련의 시기를 겪었다. 이런 때 현대자동차는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게 되었다. 세상의 우려를 떨치고 그런 시기에 한 해만에 기아자동차를 흑자로 전환시켰고 2010년에는 현대기아차를 세계 5위권 자동차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오늘 날에는&nbsp;세계 8개국에 16개의 생산 공장을 가동하여 연간 500만 대 가까이 생산하고 있다. 2022년에는 미국의 시장조사업체인 JD파워로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과 내구성을 인정받았다.&nbsp;이러한 공로로 정몽구 회장은 세계 자동차산업에서 최고권위인 자동차명예의 전당에 한국인 최초,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헌액되었다.]]></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Sun, 02 Jun 2024 20:09:4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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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줄긋기] 아메리칸 비즈니스, 미국 기업은 어떻게 성장했는가</title>
			<link>http://buff.dadamedia.net/news/view.php?idx=47323</link>
			<description><![CDATA[토머스 K. 맥크로,윌리엄 R. 차일즈. 양석진 옮김. 잇담북스. 2023.06.30.역자의 말이 책은 원문 제목 American Business Since 1920이 의미하는 그대로 1920년 이후 미국 기업들의 경영 사례와 미국 경제의 중대한 사건들, 그리고 그 영향을 통시적으로 다루고 있다. 역자는 학부와 대학원에서도 경영학을 전공했고, 십여 년간 미국 기업 분석과 자본 시장 관련 일에 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만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미국 기업활동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한 면이 많았다.&nbsp;오늘날 한국의 경제와 사회는 미국의 경제&middot;사회적 현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한국 국민들이 미국 경제와 사회의 역사적 이해가 부족하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오히려 정치&middot; 이념적으로 곡해해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이 책을 통해서 한국의 독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글로벌 업무 환경에서 일하는 기업인들에게 기업활동과 경제 현상 전반에 대한 객관적이고 통시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오랜 친구이자 훌륭한 변호사인 잇담 대표 임정근 변호사의 권유로 이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1장에서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포드와 GM간의 자동차 전쟁을통해서 포드의 아성에 도전하는 GM의 경영전략을 입체적으로 설명한다. 소위 "포드 방식의 대량생산 및 대량판매가 대세를 이루던 자동차 시장에서, GM의 알프레드 슬론은 의사결정 구조를 분권화하고, 다양하고 유연한 전략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지금은 당연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자동차 할부금융과 보상판매 방식, 그리고 소비자의 소득수준과 계층마다 차별화된 브랜드 도입을 통해 후발 주자인 GM은 미국 자동차 최대강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GM성공의 핵심적 키워드는 바로 분권화 방식의 의사결정구조이다. 중앙집권형 의사결정 방식과 분권화 방식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 애썼던 슬론의 고민은 비단 글로벌 기업의 관리자에게만 국한되는 과제가 아니다. 일반 직장인들을 포함해서, 인간 사회에서 조직의 유형과 규모를 불문하고 리더로서의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고민해봤을 화두일 것이다.2장은 20세기초부터 경제대공황 시기까지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데, 이 기간 동안 미국 경제는 2차 산업혁명의 절정기로 고도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노사간 갈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가 하면, 대기업들의 반사회적인 경제활동으로 인하여 반독점법이 제정되는 사회적 토대가 무르익기도 하였다.&nbsp;과거와 오늘날을 살아가는 미국인의 삶의 질1920년에 미국인 대부분이 삶을 살아가던 방식은 오늘날과 사뭇 달랐다. 그해 미국인의 절반은 농촌이나 소도시에 거주했다. 지역사회에는 대개 철도, 고속도로, 전화기 같은 현대적 의미의 이동 및 통신 수단이 없었고, 미국 내 다른 지역과 단절된 채로 삶을 살았다. 이민자를 제외한 미국인 대다수는 태어난 곳에서 150마일(약 240킬로미터)을 벗어나지도 못했다.1920년에는 미국 전체 가구의 3분의 1에만 전기가 공급되었다. 그래서 요리와 청소, 세탁 같은 가사노동에 드는 시간이 일주일에&nbsp;70시간이나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 변화 중 하나인 전기가 대중에게 보급된 오늘날에는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세탁기와건조기, 진공청소기, 식기세척기,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 같은 가전기기는 물론이고 패스트푸드 및 테이크아웃 레스토랑 같은 서비스업이 보편화하여 가사노동 시간이 70시간에서 15시간으로 급감했다.&nbsp;1920년에는 미국인 가운데 아이패드와 스마트워치는 차치하고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전화조차 소유한 사람이 없었다. 이메일도 없었고, 문자메시지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량생산하는 소비재 상품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러하니 온라인 또는 휴대전화로 주식시장에투자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당시에는 비행기 여행이 대중화되지도 않았고,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을 찾을 수도 없었다. 우리가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신용카드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다. 쇼핑몰이나 슈퍼마켓도 없었다쇼핑카트도 1937년이 지나서야 보급되었다). 그 시절에는 십 대 중반만 되어도 생계유지가 절박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반면, 오늘날에는 미국인의 85퍼센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당시에는 미국인 30명 중 1명이 겨우 대학교 를 졸업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4명 중 1명이 대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1920년에는 미취학 아동과 거동이 불편한 노인은 물론이고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이들을 돌보는 일까지 모두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했다. 그나마 의사가 가정으로 왕진을 가서 환자를 돌보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당시에는 폐결핵, 결핵, 콜레라, 디프테리아, 홍역,독감, 장티푸스같이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병들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망인구가 오늘날의 10배를 웃돌았다. 현대 이전에는 많은 분야에서 위생 상태가 열악했다.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만이 집 안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해놓고 있었다. 마땅한 출산제한제도와 피임기구(스스로 욕구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 또한 없거나 사용이 불법인 경우가 많아서, 가족계획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렇게 1920년대에 많은 영역에서 미국인의 삶을 지배하던 열악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선진국을 제외한 많은 나라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서 현재진행형이다.미국인 대부분과 다른 선진국의 많은 소비자들이 냉장고와 같은 현대식 가전제품의 혜택을 누리며 살게 된 지도 이제 40년이 흘렀다. 이들 상품의 발명, 개발, 제조 그리고 마케팅에 많은 미국 기업이지대한 역할을 했다.&nbsp;기업과 정부의 관계에서 정부 역할의 주목적이 기업 활동을 촉진하는 것이어야 하는지 혹은 규제하고 감독하는 것이어야 하는지는 끝나지 않는 쟁점이다. 정부는 계약관계 관련 법들을 집행하고 사회간접자본(교통 및 운송, 통신 및 은행 등)을 지원해서 기업활동을 장려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제&middot;사회적 환경에서 정부가 변화에 뒤처지지 않게 쫓아가며 기업을 적절히 규제하는 일은 항상 필요하다.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 정부는 기업가정신을 훼손하지 않고 기업들의 부정행위를 억제하는 데 나름의 성과를 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규제제도라는 것이 결코 완벽할 수는 없다. 1970년 대 들어 미국 정부는 다양한 산업을 통제하는 고삐를 느슨하게 풀기시작했다. 규제 완화는 특히 통신산업과 항공운수업에서 소비자의 선택지를 다변화하고 창업활동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규제 완화는 1980년대 미국의 저축은행 위기(Savings & Loan Crisis)와 2007년 및 2008년의 금융위기에서 볼 수 있듯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1986년부터 1995년에 걸쳐 저축은행들이 연쇄 도산한 사태. 이 기간에 3.234개의 저축은행이 파산했다. 주요 원인은 1970년대의 경기침체와 급격한 이자율 변동, 그리고 1980년대의 규제 완화에 따른 저축은행들의 과도한 위험추구형 투자행위와 기업들의 부정행위 등이다. 이 사태로 약 1,600억 달러의 비용이 발생했고, 이 중 상당 부분은 연방정부의 재정, 즉 납세자들의 돈으로 메워졌다. 이 사태를 수습하는과정에서 금융기관을 규제하는 여러 법안이 제정되었다.세 차례의 산업혁명과 기업환경의 패러다임 변화이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사례 이면에는 두 가지 두드러진 거시적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제1차, 제2차, 제3차로 이어지는 산업혁명과 경영자 자본주의(managerial capitalism)에서 금융자본주의(financial capitalism)로 이행하는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변화다.이 책에서 언급하는 사례들은 제2차 산업혁명 중반부터 제3차 산업혁명 중반 사이에 해당한다. 제1차와 제2차 산업혁명에서 발생한 여러 변화 과정을 통해 제3차 산업혁명으로 이행하는 변화도 이해할 수 있다. 산업혁명의 일반적인 정의는 서유럽과 미국에 적용되는 개념이지만,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유사한 사회&middot;경제적 변화가 나타났다.제1차 산업혁명은 1760년부터 1840년까지 이어지는데, 이 시기를 거치며 인류는 인력과 가축이 생산하는 기존 에너지를 석탄 화력에 기반한 증기기관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제1차 산업혁명 이후에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조상들이 해오던 방식대로 태양의 위치를 살&bull;펴서 시간을 측정하지 않고, 이제는 시계라는 기계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고 노동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nbsp;섬유산업과 다른 여러 산업에 관련된 대형 생산시설들이 생겨났다. 이제 노동을 세분화해서 옷감과 시계, 손목시계와 소형 무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동일한 규격의 제품을 대량생산해서 규모의 경제가 가져오는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렇게 많은 제품이 소비자에게 더욱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되었다. 거의 모든 부분에 서 시장의 힘은 사업 주체들 사이에 경쟁을 불러들였다. 사업 자금은 주로 신용에 의존해서 조달하게 되었고, 제1차 산업혁명기의 시장 자본주의 시대에는 혈연관계 또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인맥이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제2차 산업혁명은 1840년대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 산업 기반인 교통 및 운송 수단(철로, 자동차, 트럭, 비행기 등)과 통신수단(전보, 전화, 라디오 등)에서 기술적 변화를 불러왔다. 제1차 산업혁명의 중심축이던 증기기관은 이제 전기 및 내연기관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그에 따라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는 운송수단을 운용하고 대규모 공장에서 설비를 가동하려면 많은 양의 석탄과 석유가 필요해졌다. 또한 대량생산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매스 마케팅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새로운 교통 및 운송 체계를 활용하고 대량생산 및 대량판매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대규모 기업과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가 나타나고, 진화해갔다. 때문에 최종 소비자 손에 들어오는 제품의 가격은 점점 저렴해져갔다. 이러한 경영자 자본주의 시기에, 기업은 주식시장과 유럽 및 미국 동북부의 투자은행들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미국기업들은 광산과 채굴, 공장 그리고 판매와 유통 채널에 투자하기 시작했다.&nbsp;]]></description>
			<author>이민주</author>
			<pubDate>Sat, 01 Jun 2024 21:06:2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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