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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 이민주 기자
  • 등록 2024-06-04 20:14:18
  • 수정 2024-06-05 07: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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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핏연구소=이민주 기자]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양승훈. 부키. 2024. 3. 28.  


 



울산은 우리나라 산업화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성공의 역사든 고난의 현재든 비단 울산만의 이야깃거리는 아니다.


두번째로, 울산을 향한 질문은 결국 1970년대 형성해 놓은 중화학공업 위주의 수출주도산업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하는 불안을 담고 있다. 혁신이나 기술경제학 연구자들은 습관처럼 '추격형 경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제조업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일본의 생산 하청기지로 출발해서 불하받은 부품과 완제품을 분해하고 결합하며 모방했고,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한 엔지니어들의 지도하에 도면을 베끼고 개선해 나가면서 성장했다. 더불어 노동자의 숙련도를 높이기보다는 독일이나 일본의 로봇이나 NC 선반 가공 같은 장비로 생산성을 높이면서 세계 최고의 제조업 생산성을 확보했다. 그 사이 유럽은 장비와 노동력이 노후화됐고 미국은 제조업을 등한시했으며 일본은 불황 속에서 설비투자의 여력이 없었다.


한국은 산업화 이후 50년 동안 세계 5대 제조업 강국이 됐다. 대규모가공기계와 자동화 설비 투자를 통해 제조 선진국의 제품과 비슷한 품질로 더 싸고 빠르게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 '메이드 인 코리아'의 초기 전략이었다. 흔히 조선, 자동차, 종합기계 등 기계산업이 발전했던 방식인 '조립형 공업화'라 부르는 유형이다. 이러한 산업화와 수출주도 전략 아래 수혜를 받았던 도시가 울산이다. 바로 조선과 자동차가 그렇다. 해외의 플랜트 설비를 그대로 이식해 정유와 석유화학 제품을 만들어 냈던 남구의 산업도 크게 보면 차이가 없다. 울산의


자본의 이해관계에 울산이 부합했기 때문에 기업가가 울산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 '다른 무엇'을 보통 정치와 경제의 연즉 정경유착으로 생각하기 쉽다. 한편으로는 수긍할 만한 주장이나 좀 더 넓게 보면 지역 사회나 초국적 기업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관계망(네트워크)을 고려해야 할 때도 있다. 입지를 넘어선 그 무엇으로 커넥션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 이후 쿠데타 세력이 처음 했던 일 중 하나가 기업인을 부정 축재자 명목으로 가둔 것이다. 당시 삼성 이병철, 삼양사 김연수 등 부정축재자로 몰린 많은 기업인은 군사정권 초기부정 축재의 죄를 경감받을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그들은 '경제재건촉진회'를 창립했다. 이들의 대책이 바로 공장 헌납이었다. 자신 들이 기업을 경영하면서 형성한 노하우 혹은 암묵지 tacit knowledge를 통해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여 경제개발에 기여한다는 논리였다. 자금은 기업인이 외자를 유치하고 정부가 내자를 동원하는 것으로 협상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경제재건촉진회 이병철과 대한조선공사 남궁련사장 등은 1961년 11월 2일 미국과 유럽으로 외자 유치를 위해 66일간의 출장을 갔다. 돌아온 경제재건촉진회는 대규모 공업센터를 짓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이병철은 세계적 규모의 비료 공장을, 남궁련은 정유공장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이들 기업인은 각각 울산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남궁련은 1958년 일제가 짓다 만 울산 정유 공장 복구 사업에 진출한 적이 있 었다. 김연수는 1954년 울산에 제당 공장을, 1957년에는 자연 한천 


및 인조 얼음 공장을 준공했다. 인조 얼음 공장은 1962년 당시 160여 명의 노동자가 근무할 정도여서 울산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장병익, 해석할 2007:33).15이 과정에서 남궁련이 울산 정유 공장 복구 사업을 하면서 


일본 병참기지화 계획안을 박정희 의장에게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이러한 재벌의 행위를 종합하면, 재벌 사업가의 이해관계에 울 산이 부합했기 때문에 기업가들이 추천했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나 재벌 기업가가 구상을 밝히더라도 결국엔 국가의 발전 계 획과 연동돼야 하므로 정부 승인이 필요하다. 일단 짧은 시간에 성과 를 내서 보여 줘야 하는 쿠데타 정부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실제 진행 속도를 봐도 그렇다. 1962년 1월 4일 울산공업센터 지정 가능성 에 대한 토의와 조사단이 결성되고 나서 3일 후인 7일부터 14일까지 바로 현지 조사가 이루어진다. 1 월 10일에는 '경제재건촉진회'를 모태로 탄생한 한국경제인협회가 울산을 공업센터로 지정해 달라는 건의 를 했고, 13일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발표된다. 그리고 25일 에 울산특정공업지구 의결주문이 따르고 27일에 울산특정공업지구가 결정되어 31일에 공포된다. 2월 3일에 기공식이 거행되고, 2월 7일 에는 정부의 울산개발위원회 울산개발계획본부가, 3월 7일에는 울산 특별건설국이 설치된다. 두 달 만에 전국에서 가장 큰 공업센터가 구 축된 것이다. 그 계획과 결정까지 단 한 달이 걸렸다(한삼건, 2016:19) 


이런 속도전에서 국가의 리더십이나 관료의 역량을 생각해 보는 일은 자연스럽다. 우선 군사정부의 리더 박정희의 개인적 결단력을 떠 올릴 수 있겠다. 쿠데타를 일으킨 배짱으로 명운을 건 승부를 했다고 


과중동 건설공사에서 역경을 이겨 낸 입지전적 활약상은 인구에 회자 되고 위인전에까지 기록됐다.


산업도시 울산의 관점에서 현대를 다루기 위해서는 2개의 산업즉조선 해양 플랜트를 만드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의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현대중공업의 역사와 성공 요인


우선 현대중공업부터 보자. 널리 알려진 대로 간략히 요약하자면,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던 박정희가 정주영에게 조선업을 시작해 볼것을 권유(혹은 압박)하자 자본도 기술도 없던 정주영이 전 세계를 헤매다가 그리스 리바노스사의 유조선 2척을 수주하고, 그 수주 계약서를 가지고 영국 바클레이 Barclay 은행에서 차관을 받아 조선소 부지를 조성하면서 동시에 선박을 건조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선박 수주는 19701년 12월, 조선소 부지 조성 사업은 1971년 4월, 조선소 기공식은 1972년 3월이었다. 1973년 3월 선박 건조가 시작됐는데 1974년에야 1~2 도크가 완공됐다. 일정에 맞추기 위해 도크 완성 전에 탑재할 블록을 동시에 맨바닥yard에서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배를 지을 생산직 인력도 선박 건조가 시작되는 시점에 훈련원 1기생이 간신히 수료함으로써 준비가 됐다. 병행 혹은 병렬 parallel 공정으로 조선소 건설, 선박 건조, 건조 인력 양성을 한 번에 해낸 것이다. 그리고 1년 8개월 만인 1974년11월에 첫 번째 선박을 선주에게 인도했다. 선박 건조 경험이 없는 현 대가 순식간에 글로벌 시장에서 최상위권 조선사로 자리 잡았다.



정주영의 표현에 따르면 건설업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이 조선업을 일구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제가 조선소를 짓겠다고 하자 회사 내에서도 "우리가 무슨 경험이 있 다고 조선소를 만드느냐"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조선업이라는 것이 철판으로 큰 덩치의 탱크를 만 들어 바다 위에 띄우고 중력에 의한 추진력으로 달리는 것밖에 더 있느냐 고 생각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조선업에 대한 경험은 없지만 발전소 

나 정유 공장 등을 많이 해 봐서 어떤 형태든 철판에 대한 설계나 용접은 자신이 있고 내연기관을 장착시키는 일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를 큰 탱크로 보고 그 탱크 속에 엔진을 붙이면 된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정유 공장을 세울 때처럼 탱크를 도면대로 구부려서 용접을  하면 되고, 속의 기계도 우리가 건물을 지을 때 냉온방 장치 다 따로 넣듯 이 선박의 기계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해서 끼우면 된다는 발상으로 조 선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조선업자는 이런 발상을 하지 못할 것입니 다. 건설업자니까 그렇게 아주 쉽게 생각을 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 리는 그동안 산업 플랜트를 하면서 많은 기술을 습득했고 기계, 강전, 약 전 등 어떤 계통이든지 각급 기술자가 다 있었기 때문에 선박이 아무리 어 렵다 하더라도 다 해낼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덩치가 크다고 해 서 제조라는 말 대신 건조shipbuilding 라고 하는 것이지 사실 만드는 모든 과 정은 건축과 비슷한 것입니다. (정주영, 1997:28-29)



1980년대부터 울산 현대조선소는 수주량이나 건조량에서 세계 1위 조선소의 위치를 점하는 해가 늘었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부인 로 배를 가격 경할 수 없는 세계 1 위 조선소가 됐다. 


이러한 현대중공업의 성공 요인을 보는 세가지 시각이 있다. 먼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 공업화 정책 즉 테크노크라트(기술관 에 없)의 혜안 때문이라는 시각이다. 상공부 장관 오원철로 대표되는 테 크노크라트가 철강,조선, 비철금속, 기계, 전자, 화학 공업이라는 '미래 

다는 먹거리'를 잘 설정하고, 정책 금융을 통해 저리 대출 및 해외 차관을 육성했기 때문에 그중 한 산업을 담당했던 현대가 조선업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발전국가의 시각은 산업을 운영했던 일련의 환경 중 아주 협소한 '배경'만을 설명한다. 일단 국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바라봤던 조선업의 상태, 국제적으로 얽혀 있는 선박 및 해운 시장의 행위자들을 제외한다는 문제가 있다. 



국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유 공장 건설에 이어서 조선소 건조에 서도 난항에 빠져 있던 정주영에게 해운 업계의 다양한 사람을 연결해 주었던 밴 플리트 같은 인물이 그렇다.20 국내적 관점에서도 문제다.조 선업을 정주영이 처음 시작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60년 대 국내의 가장 큰 조선소는 국영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였다. 앞서 비료 공장 이야기에도 등장하던 남궁련이 바로 대한조선공사 경영 인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조선공사는 내수용 선박을 짓던 회사였고, 


기술력 부족으로 수출용 선박을 건조하지 못했다. 대한조선공사는 내 수용 선박 위주임에도 경영 상태가 좋지 못했다.


국내 해운사로  배를 짓기보다는 일본 등에서 매각하는 중고 선박을 구매하려고 해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국영기업이기 때문에 도산 하지는 않았으나 경영 위기가 올 때마다 정부의 공적 자금을 받을 수밖 에 없었으니 정부 관점에서는 골칫덩이였다. 박정희 정부에서 재정과 경제기획을 추진하던 경제기획원은 경영 상태를 개선하지 못하는 대 

한조선공사의 사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출을 위한 조선소를 짓겠다는 발상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달리 말해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으 로 현대중공업을 일궜다는 첫 번째 시각만으로 전체 그림을 그리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다. 


두 번째 시각은 정주영이라는 불세출의 산업 자본가를 위시한 현대그룹의 공이라는 해석이다. 차관을 따내기 위해 영국에 찾아가 바클 레이 은행장앞에서 동전에 새겨진 거북선을 보여 주며 기술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준다거나, 선박 건조 과정을 건설과 비슷하게 파악해 공 법을 단순화하고 건설업에서 얻은 통찰을 조선 공법에도 반영할 수 있 도록 했다는 예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영자나 현대그룹의 공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도 많다. 

애초 현대조선소의 초대 조선 소장은 덴마크 오덴세 조선소 출신 의 엔지니어였다. 1970년대 당시 덴마크 조선소는 기본설계→상세 설계 → 생산설계로 이어지는 단계 중 처음 선박의 구상 단계인 기본설 계와 구역을 나누는 상세설계에 강점이 있었고, 실제 작업자들에게 필 요한 도면을 그려 내는 생산설계는 잘 수행하지 못했다. 덴마크 조선 소는 후행 설계부터 최종 건조까지의 과정을 큰 단위로는 관리할 수 있었으나, 일본처럼 미세 작업 관리를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정주영㊽ 기본설계와 상세설계 도면을 유럽에서 사오고 그 뒤의 과정은 기존끼 안해 낸 엔지니어들 영업 꼭 필요한 발판도 



 건설업에서 했던 공법을 도면의 주인인 유럽의 공정 전문가를에 적용하면 다 될 줄 알았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결국 선박 건조의 새 하여 작업했던 노 엔지 폭발적으로 늘어 

밀한 부분을 배우기 위해 처음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로 이들이 현대중공 

니어 인력을 파견 보내 교육시키고22,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의 공법을 배우고 '베껴 오는 방식으로 조선 기술의 수준을 높였다(박기주 외, 2014:432-433) 


다음으로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행착오를 어떠한 방식으로푸 하 선 건조를 는지를 살펴보자. 장기 관점에서는 국가가 지원금을 주고 기업이 책임 질 모두를 들 지고 양성하는 '직업훈련소'라는 제도적 쟁점과 맞닿고, 단기 관점에 현대자 서는 기지를 통해 난관을 돌파했던 현장의 엔지니어와 노동자의 '기민 현대 함'에 대해 예찬하게 된다. 더불어 리바노스에서 수주한 첫 번째 유조 화학 공선 건조 과정에서 노동자 수십 명이 중대 재해를 입어 목숨을 잃게 되 는데, 많은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배제하고서 현대중공업의 성공을 설 

명할 수는 없다. 


여기서 현대중공업의 성공을 보는 세 번째 시각이 도출된다. 즉 중 공업 안팎의 여러 사람이 이루어 낸 성공이라는 견해다. 이역만리 스코틀랜드까지 찾아가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혀 오고, 일본에 건너가 전 호 도면 작성법과 설계 기술을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일본인 엔지니어들 에게 묻고 되묻고 다시 확인한 이들의 공로다. 유럽식과 일본식 선박 건조 기술을 혼합해서 그 나름의 현대중공업 스타일의 건조 기술로 창안해 낸 엔지니어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뜻이다. 또 고소(높은 곳) 작업 에 꼭 필요한 발판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현장에서 밧줄에 몸을 의지 하여 작업했던 노동자들의 헌신도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일할 곳을 찾아야만 했던 1970~1990년대의 젊은 


이들이 현대중공업의 성공을 일궈 낸또 하나의 힘이었다. 현대중공업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1980년대를 지나며 선박 생산 설계를 넘어 상세설계와 기본설계를 자체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 었고, 엔진 등 주요 부품과 장비를 국산화해 냈다. 1990년대 후반LNG 

선 건조를 해낼 당시에는 90퍼센트가 넘는 국산화와 원가 절감, 고품 질 모두를 달성해 내서 세계 최고 조선소가 됐다. 



현대자동차의 성공 요인 


현대자동차의 성공도 같은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편에는 중 화학 공업화와 국산차 개발에 대한 정책의 지원이 있었다. 다른 한편 에는 정주영이 해방 직후 정비소 시절부터 간직해 온 자동차 산업에 진 출하려는 집념이 있었고, 정세영의 내연기관 엔진 국산화에 대한 신념 이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현장에서 어떻게 해서든 기술적 혹은 공학적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 애썼던 작업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현 대자동차 공장을 살펴보던 외국인 엔지니어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계가 고장 났다고 해서 나와 팀이 되어 늘 함께 다니는 정비공과 같


한국은 제조업으로 지탱되는 국가다. 국가 이미지나 숫자로도 바 로 드러난다. OECD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은 국민총생산 (GDP)의 27.1퍼센트를 제조업을 통해 벌었는데, 한국보다GDP 중 제 조업 비중이 높은 국가는 아일랜드(36.6퍼센트)밖에 없다. 고용 면에서 

보면그 특징이 더 도드라진다.' 세계은행의 산업별 고용률 자료를 참고해 보면,2019년 기준 한국은 총 고용에서 제조업이 25퍼센트를 담 당한다.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으로 OECD 국가 중에서 한국보다 


제조업 고용 비중이 더 높은 나라는 독일(27퍼센트)이나 이탈리아(26퍼 •기간 동안 방역에서 선방해 공장 가동을 멈추지 않았던 한국의 제조업 센트) 정도다. 코로나19로 인해 세계 경제가 움츠러든 2020~2021년 비중은 GDP로 보든 고용으로 보든 더 높아질 수도 있다.


제조업 국가 대한민국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이나 분당, 일산 같은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공장이 어디에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지천이 공업 지대다.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수원, 평택으로 시작하는 산업 벨트가 나온다. 수도권의 상습 정체 구간으로 악명 높은 서부간선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독산, 소하, 시흥, 안양 모두가 공단 지역이다. 4호선도 시철도를 타고 남쪽으로 평촌만 지나면 곧 군포산업단지나 안산의 반 월국가산업단지까지 공단 지대가 펼쳐진다. 


1호선 경인선을 탄다면?

서울만 빠져나가면 부천에 거대한 산단이 있고, 인천에 도착하면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길에 쏟아져 나오는 남동공단과 부평 GM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당장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던 상황을 생각해 보자.


2020년 3~4월에 잠시 벌어졌던 KF 94, KF 80, KF AD 등 마스크 부족 상황이 있었다. 이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삼성전자 스마트공장 지원 센터의 엔지니어들이 마스크 제조 업체의 생산설비를 점검해서 최적화했고, 곧 생산 물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공급 부족을 해소했다.대기업의 생산기술 노하우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실제로 울산에서는 공장장 이상 기술 임원들의 퇴직자 모임인 NCNNew Challenge Network이 2008년에 출범해 중소기업과 제조 스타트업 등에 기수기이

hankook6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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