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1조 원짜리 석사학위 논문(윤진기 교수의 경제와 숫자 이야기)
  • 윤진기 교수
  • 등록 2018-07-16 10:17:16
  • 수정 2024-02-13 17:47:39
  • 목록 바로가기목록으로
  • 링크복사
  • 댓글
  • 인쇄
  • 폰트 키우기 폰트 줄이기

기사수정


1조 원짜리 석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이 있다면 일반 사람들은 매우 놀랄 것이다. 박사학위 논문도 아니고 석사학위 논문이 어떻게 1조 원이나 될 수 있느냐고 반신반의하면서 그게 도대체 어떤 논문이냐고, 더 나아가 진짜로 있는 이야기인가 하고 물어볼 것이다. 학력이 인플레 되고 세상에 정보가 넘쳐나면서 사람들은 지식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다.

 

인문사회 분야에서 지금까지 필자가 알고 있는 가장 비싼 연구보고서는 미국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가 6.25 당시 중국의 태도를 예측하기 위하여 작성한 보고서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랜드연구소는 이 보고서를 당시 최신 전투기 한 대를 살 수 있는 금액에 상당하는 500만 달러에 미국의 대중정책연구소에 넘겼다.(자세한 것은 汪中求 저, 허유영 역, 작지만 강력한 디테일의 힘, 올림, 2016, 206면 참조) 2016년 우리 공군 노후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한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서 선정된 F-35의 가격이 당시 대당 1억 달러(대략 1173억 원)였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그 보고서는 지금 가치로는 대략 1천억 원짜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조 원짜리 석사학위 논문은 대략 그 전투기 10대 값에 해당한다. 이 논문을 쓴 사람은 뉴질랜드의 Richard Chandler이다. 그는 1982년 Auckland 대학에서 경영학석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논문이 “뉴질랜드 상장회사 기업지배구조의 실제(Corporate Directorship Practices* in New Zealand Listed Public Companies)”였다. 그의 결론은 지배구조가 좋지 않은 회사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면 회사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논문을 제출하고 그의 동생과 함께 자산운용사 ‘Sovereign Global Investment’를 설립했다.

 

그는 신흥시장에 뛰어들어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들을 찾아내 주식을 대거 사들인 뒤 보유지분의 힘을 빌려 지배구조 개선을 시도했다. 지배구조가 정상적인 수준에 도달하면 투자자들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주식은 오르게 된다. 2003년 한국의 SK(주)에 대한 투자는 자신의 논문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해준 가장 좋은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003년 SK글로벌이 1조5817억 원대 분식회계를 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해외 법인과의 거래대금을 조작하여 자산과 이익을 부풀리는 방법을 썼다. SK글로벌은 제품·원자재 등을 구매하면서 물건을 받고나서 대금을 치르지 않은 외상매입금을 장부에서 누락시켰는데, 이 액수가 1조 원이 넘었다. 해외 법인이 손실을 입었는데도 이를 반영하지 않았으며, 가짜 매출채권을 버젓이 회계장부에 기입해 넣었다. SK(주)는 SK글로벌의 모회사였기 때문에 주가가 1만3천 원에서 6천 원 언저리로 폭락하였다.

 

이를 틈타 Sovereign Global Investment는 SK의 주식 1902만800주(14.99% 혹자는 14.82%라고 한다)를 사들여 2대 주주로 올랐다. 총 1768억 원의 돈이 들어갔다. 이후 최태원 회장 퇴진을 비롯,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SK는 백기사 모집 등 경영권 방어에 1조원 가까운 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다. 소버린은 2년 3개월 후 주식을 매도하여 거의 1조 원(9359억 원, 시세차익 7558억, 배당 485억, 환차익 1316억 포함, 세금 제외)을 벌었다.

 

Richard Chandler가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 이러한 성공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SK(주)의 주식을 팔고 고향 뉴질랜드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뉴질랜드 최고의 부자가 되어 있었다. 당시 The New Zealand Herald는 “형제가 부자 명단에서 최고의 거물들을 제압하다(Brothers knock magnates from top of rich list)”라는 기사를 실어서 그들의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그때가 2005년 7월 22일이었다. 이 날은 뉴질랜드에서는 좋은 날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슬픈 날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멋진 논문이 많이 나와야 한다. 국가를 떠나서 보면 논문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석사학위 논문이라고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지식을 탐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신나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이공 분야에서 찾아보면 이런 정도의 논문은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주석]

*Corporate Directorship는 원래 기업의 이사직 또는 임원을 나타내는 것인데, 여기서는 위와 같이 의역하였다.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http://www.richardchandler.com/publications/Great%20Companies%20Great%20Nations_0709.pdf 현재는 이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고 있음

 

http://www.nzherald.co.nz/business/news/article.cfm?c_id=3&objectid=10337047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주간 뉴스 클리핑] 부동산사회 [부동산]- 재무구조 개선 태영건설 윤세영등 임원22명 감축- 전세사기 피해금, 올해 더 늘었다…작년 4.3조, 올해는 벌써 1.4조 떼여- 서울 아파트값 4주 연속 상승…경기는 다시 하락 전환 [사회]- 임대차 미신고 과태료 1년 더 유예- 장애인단체 지하철 시위…4호선 혜화역 약 1시간 무정차 통과- "어찌 되든 빨리 결정을"…오락가.
  2. DSR, 비철금속주 고ROE+저PER+저PBR 1위 DSR(대표이사 홍석빈. 155660)이 4월 비철금속주 고ROE+저PER+저PBR 1위를 기록했다.버핏연구소 조사 결과 DSR은 비철금속주에서 고ROE+저PER+저PBR 1위를 차지했으며, 풍산홀딩스(005810), 황금에스티(032560), 태경비케이(014580)가 뒤를 이었다.DSR은 지난해 매출액 2911억원, 영업이익 243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매출액은 20.79% 증가, 영업이익은 32.12% 감소...
  3. [윤진기 명예교수의 경제와 숫자 이야기] 니콜라스 다비스 투자 이야기의 함정 니콜라스 다비스(Nicolas Darvas, 1920-1977)는 헝가리 출신의 무용가인데, 주식투자를 해서 짧은 기간에 200만불을 넘게 벌었다. 그의 투자 이야기는 그의 책 《나는 주식투자로 250만불을 벌었다》에 잘 소개되어 있다. [1]니콜라스 다비스는 주식투자를 하면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 끝에 ‘박스이론’(Box Theory)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주가가 일정한 .
  4. 제이엠티, 디스플레이장비및부품주 저PER 1위... 4.55 제이엠티(대표이사 정수연. 094970)가 5월 디스플레이장비및부품주 저PER 1위를 기록했다.버핏연구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제이엠티는 5월 디스플레이장비및부품주에서 PER 4.55배로 가장 낮았다. 이어 한국컴퓨터(054040)(4.7), 인지디스플레(037330)(5.23), 톱텍(108230)(5.45)가 뒤를 이었다.제이엠티는 지난해 매출액 1227억원, 영업이익 148억원을 기록하며...
  5. [버핏 리포트] 고려아연, 신사업 성과가 주가 상승 Key-신한 신한투자증권이 8일 고려아연(010130)에 대해 신사업 부문 성과 및 최근 이어지고 있는 금속 가격 상승 랠리를 통해 중장기적 이익 개선이 기대된다며 투자의견은 '매수', 목표주가는 60만원으로 평가 유지했다. 고려아연의 전일 종가는 47만3000원이다.고려아연의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1845억원(YoY +26.54%)이다. 연(납) 판매량이...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