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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경제학 편
  • 이민주
  • 등록 2022-05-08 16:53:27
  • 수정 2024-02-18 19: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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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경제학 편. 황유뉴 엮음. 이지은 옮김. 시그마북스 펴냄. 2007월 01일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이야기. [이미지=예스24]

- 인류 최초의 경제는 신석기 시대에 시작됐다. 지금으로부터 10만년전, 터키에 인류는 땅을 경작해 조, 밀, 보리를 심었고 소에 쟁기를 실어 밭을 갈았다. 집에서는 말, 소, 양, 돼지를 길렀다. 그러자 풍족해졌다. 이른바 신석기 혁명으로 가져온 농업 시대의 개막이다. 신석기인들은 농업을 발명했고, 경제를 발명했다. 이것이 경제의 탄생이다.


- 노동이 분업화하면서 예술가, 점성술사, 교사, 국왕, 노예 같은 집단이 생겨났다. 다시 말해 노동이 분업화 되면서 비로소 문화, 과학, 예술이 탄생했다.


- 1271년 베니스 상인 마르코 폴로(1254~1324)는 바그다드와 보스니아를 거쳐 중국 베이징에 도착하기 까지의 여행 기록을 담은 <동방견문록>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중국의 광활한 땅과 풍부한 자원, 발달한 경제와 무역 시스템을 소개했다. 이 책은 유럽인은 물론이고 베니스 상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베니스는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막강하고 부유한 도시로 발전했다 베니스는 유럽 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라이벌이던 제노바는 밀려 났다.


- 베니스 상인들은 막강한 상선단을 만들어 베니스의 물건을 콘스탄티노플의 알렉산드리아로 운반하고, 다시 그곳에서 인도, 페르시아산 보석, 포목, 향추, 후추, 정향나무, 육두구(향신료의 일종0를 베니스로 가져왔다. 중세기 말엽 유럽의 생산성은 극도로 낮아 당시 유럽인들은 커피, 차, 신선한 과일, 야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식사는 스프, 빵, 절임 고기였다. 따라서 보관하기 쉽도록 고기를 소금에 절이고,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향신료와 육두구 같은 조미료가 필요했다. 조미료는 향료섬, 즉 지금의 인도와 인도양 섬에서 자라는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었다. 베니스 상인들은 향신료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됐다.


- 베니스 상인에게서 상술을 배워 성공한 유럽의 걸출한 상인이 한스 푸거(Hans Fugger)였다. 한스 푸거는 자본주의 개막 이후 최초의 억만장자이댜. 한스 푸거는 1367년 레히필드의 그라벤에서 아우크스부르크로 건너가 직물공의 제자가 됐다. 고향에 있는 푸거의 가족들은 대부분 스바비아 농가처럼 집에 베틀 한대를 갖고 있었다. 독일 남부의 밭에 자라고 있는 아마를 농가의 여자들과 도시의 직공들이 로브, 바지나 옷으로 만들 수 있는 옷감으로 짰다. 한스 푸거는 어렸을 적부터 이 기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와 면화를 한데 섞어 방직기로 단순한 마에 비해 섬세하고 탄력을 갖고 있는 면 플란넬(Flannel)을 짜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플란넬은 이제 아우크스부르크에서도 생산됐다. 푸거는 도시와 주변 지역에서의 장사에 만족하지 않고 장거리 무역에 뛰어들었다. 면화를 당시 새로운 섬유 소재로 큰 인기를 끌었으나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돈을 주고 다른 곳에서 사와야 했다.


-나름대로 성공한 푸거였지만 더 큰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폐경제 시스템을 알아야 했다. 머리 회전이 빨랐던 푸거는 다른 직공들에게서 상품을 구입한 뒤 다시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푸거가 대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지리적 조건도 한몫했다. 베니스에서 프랑크푸르트, 빈에서 스트라스부르에 이르는 고대 상업 루트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아우크스부르크는 푸거에게 부를 안겨 주었다.


-한스 푸거 시대에 이미 푸거 가문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일가는 부자 가문으로 성장했다. 한스 푸거의 아들 야콥 푸거(푸거 2세, 1459~1525)는 종합상사를 세우고 러시아의 노브고르트에서부터 스페인의 세빌리아, 런던에서부터 나폴리에 이르기까지 지사를 세웠다. 한스의 아들 야콥은 1459~1525년에 이르는 자신의 일생 동안 푸거 가문을 유럽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시켰다.


-야콥은 비즈니스와 금융을 교묘히 결합시켜 돈을 통해 많은 것들을 누렸다. 야콥은 돈을 단순한 돈이 아니라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욕망까지 모두 성취할 수 있는 자본으로 성장 시켰다.

1-9세에 회사 경영에 참여한 야콥 2세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베네치아로 건너갔다.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화려하고 발달한 부자 도시 베네치아에는 독일 상인들이 세운 폰카도 디 데데스키 Fondaco Dei Tedeschi 라고 불리는 비즈니스 센터가 있었다.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 회의나 업무를 보는 사무실,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는 이 곳에서 독일 상인들은 회의를 열거나 상업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야콥 2세는 독일 상인이 아닌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독일 상인들보다 두뇌 회전과 손익 계산이 빠른 이탈리아 상인에게 더 관심이 갔다. 그는 그들로부터 은행 업무를 배웠고, 복식 부기의 편리성을 발견했다. 야콥 푸거는 복식 부기의 편리성을 깨달은 최초의 독일 상인이 됐다. 훗날 본격적으로 회사 경영을 맡게 된 야콥 2세는 복식 부기를 경영 수단으로 사용했다.


-야콥 2세의 회계사 마르쿠스 슈와츠 Marcus Schwarz는 효율적인 복식 부기를 만든 전설적인 인물이 됐다. 야콥 2세는 26세에 가문 후계자 규정에 따라 인스부르크에서 일을 배우게 됐다. 당시 티롤 주도의 통치자는 지그문트 폰 합스부르크 공작이었다. 인스부르크 부근에 있는 카르베델 산맥에 있는 슈와츠 지역에서 은광이 발견돼 지그문트 공작은 "하늘이 내린 부자"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사치로 빚에 허덕였다...(더 쓸 것).


-돈 때문에 베네치아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야콥 푸거 2세는 푸거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1525년 야콥 푸거 2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조카인 안톤 푸거가 가문의 수장에 오르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안톤 푸거와 그의 아들 마르쿠스는 황제, 국왕들과 대규모 거래를 하는 시대는 더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푸거 가문은 상사에서 자금을 빼내 위험 부담이 적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지주로 변신한 푸거 가문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여전히 100년동안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더이상 상사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푸거 가문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푸거 가문은 신용 대출의 기반을 다지며 상업과 수공업을 한층 더 발전시킬수도 있었다.


-푸거 가문은 기득층과 손잡고 종교 혁명과 종교 자유를 거부하고, 개혁 세력을 압박했고, 아프리카 노예 매매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장부를 위조하고 은폐했다.


-야코프 푸거는 록펠러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세계사의 유일한 이코노미쿠스였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란 모든 결정에서 경제 원칙을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야코프 푸거는 평생 동안 이윤 극대화의 논리에 충실했다. *** 야코프 푸거는 자본이 권력을 지배하는 세상을 활짝 열어 젖힌 인물이었다.


-1478년 19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상회를 물려 받을 당시 야코프 푸거는 고위 정치계 인사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푸거 가문의 가업은 직물 도소매업으로, 왕가에 돈을 대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야코프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 받은 것은 전혀 뜻밖의 사건이었다. 5형제 가운데 막내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내정돼 있었다. 하지만 형들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자 프랑크 중부의 헤리덴 수도원에서 서품을 받은 즉시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만일 그가 형제 가운데 제일 야망이 컸던 왕의 막내 아들이었다면 형제들의 죽음을 사주했으리라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류층의 상인 집안에서 누구도 그런 상상을 하지 않았다.


-야코프는 서둘러 부상하고 있던 군주와 거래를 텄다. 상대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1508년 로마 황제로 선출돼 막시밀리안 1세가 된 티롤의 대공이었다. 막시밀리안은 황제로 선출되기까지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돈이 없는 대신에 풍부한 은과 구리가 매장된 티롤 지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애용되던 담보 형식이었다. 군주나 왕에게 대출을 해주는 사람은 늘 그들이 부채를 갚지 못할 상황을 계산에 넣어야 했다. 그런 경우 채무자들은 빚 대신 저당 잡은 재산을 받았다.


-푸거에게는 당대의 다른 경쟁자를 앞서는 두가지 강점이 있었다. 첫째, 푸거의 광산은 노동생산성이 높았다. 푸거는 기술자에게 경영을 맡겨 조직적인 관리를 함으로써 비생산적인 작업 정지 시간을 현격하게 줄였다. 이는 후대의 '테일러리즘의 창시자' 프레드릭 테일러의 관심을 끌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특별히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었다.


-둘째, 푸거는 부패를 활용했다. 막시밀리언의 재정 관리청이었던 인스브루커 라이트카머에서 제법 말이 먹히는 사람은 모조리, 그리고 막시밀리안의 개인 자문들 가운데 다수가 이런저런 형태로 푸거의 뇌물 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러니 다른 상인들이 훨씬 싼 금액을 제의한다고 해도 무조건 푸거가에게 일일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1492년 한해에만 푸거는 티롤 광산에서 50만굴덴(약 20톤)의 은을 채굴했다.


-푸거의 또다른 강점은 정보력이었다. 당대에 푸거의 비밀 정보기관보다 더 신속하게 정확하게 소식을 물어오는 파발꾼을 거느린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는 독창적인 ***기술이 작용됐다. 푸거의 소식통은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더 속도가 빨랐다. 푸거의 기업 전략상 아주 중요한 구간, 즉 스페인의 수은 광산에서 아우쿠스부르크의 중심지까지는 거울을 이용한 빛 신호를 통해 정보를 전달했다. 신빙성을 떨어지지만 알마덴에서 아우쿠스부르크까지 2시간이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속한 전달 속도는 이후 30년이 넘도록 어느 누구도 따라잡지 못했다.


- 푸거는 방대한 정보망도 구축했다. 이런 정보망의 구축과정에서 푸거 가문은 200년 후가 되면 상당한 돈벌이가 되는 상품인 신문을 고안했다.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소식 가운데 푸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소식을 선별해 신문에 담아 공개했던 것이다.


- 푸거는 교황청을 통해 면죄부 사업에도 손을 댔다.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가 총 4만 8,239 황금 굴덴에 해당하는 푸거의 자금으로 마르데부르크와 마인츠의 대주교구를 손안에 넣고 나자 대규모의 면죄부 판매를 통해 자금 회수에 나섰다. 푸거 가문의 로마 지점장 요하네스 칭크(Johannes Zink)는 전적으로 면죄부 인가를 담당하는 교황 레옹 10세에게 처음부터 마크데부르크와 마인츠의 양대 대주교구가 구매 가격을 후하게 쳐주는 대신 후한 면죄부를 요구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4만 8,239 황금 굴덴이라는 엄청난 금액 외에도 후한 수익 분담을 약속해 교황의 결정을 도와주었다. 교황이 인가한 면죄부의 경우 수입의 3분의 1이 바티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 경우 절반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망설이지 않았다. 레오 10세는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에게 독일 제국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팔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이런 특혜의 실천은 야코프 푸거의 몫이었다. 독일의 악명 높은 면죄부 설교자들은 이 사업의 수입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수 있도록 하는데 둘도 없는 적임자들이었다.


- 푸거 가문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하지 않은 일은 없었다. 면죄부의 사면효과는 8년으로 한시적이었으며 사전이 미리 해지할 수 없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작성한 95개개 반박문은 면죄부의 판매를 반대하려는 목적이었다. 백성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진 교회의 탐욕에 대한 반감은 루터가 뿌린 씨앗이 힘차게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돼 주었다.


-필사신문은 서한신문이 발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사신문은 뉴스 수집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서한신문의 말미에 붙은 소식만을 따로 모아 필사하여 판매하는 자가 나타나면서 등장했다. 당시 이것을 가제트(Gazette)라 불렀다.


-필사신문과 서한신문의 근본적 차이점은 필사신문은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인 신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필사신문은 좀 더 근대적 성격을 띤 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이 유가지가 되면서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신문 제작자가 나타났으며, 구독자를 중심으로 한 뉴스시장이 생겼다.


-필사신문 제작자는 더 잘 팔리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뉴스를 삭제하거나 추가하는 등 편집을 함으로써 신문의 내용을 다양하고 읽기 편리하게 했다. 이러한 신문은 이탈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 크게 발달하였다.


-가제트는 153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발간된 신문이다. 가제트는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공개적인 보급 판매를 시작한 신문이다. 당시 베네치아에서 소액의 동전으로 신문을 사볼 수 있었던 것은 혁명적 일이었다. 또한 가제트는 그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근대적 의미의 신문에 가장 가까운 신문이다.


- 푸거차이퉁. 가장 대표적인 필사신문으로 독일에서 1568년부터 1604년에 걸쳐 발행되었다. 15세기를 전후해 유럽에서 무역업이나 금융업을 통해 거부가 된 가문은 대표적으로 푸거가와 메디치가를 들 수 있다. 그들은 14세기부터 막대한 재력을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이 부를 축척하기 위해서는 세계 도처의 정보와 뉴스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푸거는 엄청난 재력을 통해 필요한 뉴스나 정보를 세계 여러 곳에서 정기적으로 수집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세계 여러 나라 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는 대신 그 나라의 관리, 군인, 선교사, 선장, 무역상, 은행가들로부터 정기적으로 정보와 뉴스를 수집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뉴스와 정보를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샀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질적으로 보다 우수한 뉴스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 뉴스레터는 독일에서 나온 푸거자이퉁을 본떠서 만든 신문으로 런던의 뉴스와 공중에 관한 소식을 지방 각지의 영주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 뉴스레터는 16~17세기에 걸쳐 이탈리아, 독일,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등 여러 나라에서 발행되었다.


-뉴스레터와 같은 필사 신문은 대체로 구독자와 미리 계약을 맺고서 그가 매주 요구하는 면수에 따라 1년 혹은 4개월의 선금을 받고 판매되었다. 필사신문은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한번 읽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읽는 보통이었다.


- 나탄 로스차일드 Nathan Rothschild 의 인생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거주지역인 게토에서 시작된다. 당시 프랑크 푸르트의 유대인들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좁고 낡은 게토에서 생황해야 했다. 나탄의 아버지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잡화점의 장남으로 문위에 빨간 방페가 걸린 가게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 가게의 사람들을 빨간 방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주식 투자로 재산을 형성했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돈을 댔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군과 연합군사이에 대혈전이 벌어졌다. 결국 프러시아의 블뤼허 장군이 나폴레옹을 격파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815년에는 전화도 팩스도 없었다. 가장 빨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나탄은 잉글리시 해협의 선장들에게 많은 돈을 주고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최대한 빨리 입수했다.


-1800년께 공업 도시로 찾아온 사람들 중 나탄 로스차일드는 가장 성공한 투자자이자 자본가였다. 대다수 도시민들이 무산 계급의 노동자로 전락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공업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평생 허드렛일만 하다가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 시켰다. 노동자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면직 공장, 방직 공장, 광산에서 일했다. 성인 뿐만 아니라 열 두 살 미만의 아이들도 하루 12시간 심지어 15시간을 일했다. 당시 노동자들이 받는 보수는 인간 다운 삶 커녕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이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한 인물이 헨리 포드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쓰는데 자신의 평생을 바쳤다. 1843년 정체경제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마르크스는 1867년 <자본론> 제1판을 출판하기까지 20여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이 기간 동안 마르크스는 많은 이론서를 읽고 다양한 감상문을 남겼다. 당시 거의 모든 정치 경제학, 경제 역사서와 화폐은행 등에 관한 다양한 책을 읽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병이 마르크스를 괴롭혔으나 마르크스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은 생필품도 없이 빛과 위협 속에서 지내야 했다. 심지어 원고를 살 돈이 없자 마르크스는 옷을 전당포에 맡기는 바람에 외출을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의 가족들도 몇 주일 내내 빵과 감자 만으로 끼니를 떼우며 고된 시간을 보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줄곧 무덤가를 배회횄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일할 수 있는 모든 시간과 환경을 이용해 <자본론>이라는 나의 저서를 남기게 됐다. 이 책을 위해서 나는 나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가정을 포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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