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롯데건설 사태의 원인은 롯데건설과는 아무 관계없어요.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ABCP채권 미상환 선언'이 출발점이지요. 한국 자본시장이 왜 디스카운트받는지를 새삼 깨닫게해주네요."
지난달 31일 공시된 '2022년 롯데건설 사업보고서'를 들여다본 어느 재무 전문가의 진단이다.
지난해 말 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레고랜드 사태로 롯데건설이 얼마나 휘청거렸는지를 보여주는 '2022년 롯데건설 사업보고서'가 최근 공시됐다. 이 사업보고서를 보면 롯데건설은 물론이고 롯데건설의 최대주주(44.00%) 롯데케미칼, 나아가 롯데그룹 전체가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사투'(死鬪)를 벌였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지난해 12월 초 박현철 대표이사의 취임 전후로 급박했던 재무 현황도 나와 있다
◆레고랜드 사태로 3조(兆)대 '어음 상환' 리스크 터져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롯데건설은 지난 한해 동안 차입금 4조4606억원을 조달했다. 평소 2조원대 차입금을 조달하던 것에 비해 2.5배 가량 증가한 수치다(이하 K-IFRS 별도). 차입금의 대부분은 지난해 9월 28일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강원중도개발공사의 기업회생신청을 선언하면서 촉발된 레고랜드 사태 이후 조달됐다.
롯데건설은 레고랜드 사태가 터지면서 둔촌주공PF(프로젝트 파이낸싱)의 만기가 도래한 3조원대 ABCP(자산유동화기업어음·Asset Backed Commercial Paper)를 갚아야 했다. 둔촌주공PF의 ABCP는 평소대로라면 차환(借換·빌려서 갚는 것)하면 됐지만 레고랜드 사태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다급해진 롯데건설이 손을 벌린 상대는 우선 롯데계열사들이었다. 앞서 롯데건설은 사채(corporate bond) 발행도 검토했으나 15% 고금리에도 수요 미달로 포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건설은 모기업에 해당하는 롯데케미칼로부터 5000억원을 차입했다. 이자율은 6.39%, 상환일은 올해 1월 18일이다. 이밖에 롯데정밀화학으로부터 3000억원(이자율 7.55%. 상환일 2023년 2월8일), 우리홈쇼핑(상호명 롯데홈쇼핑)으로부터 1000억원(이자율 7.65%. 상환일 2023년 2월 9일)을 조달했다. 이것도 모자라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통해 1782억원을 조달했다. 주주배정 유상증자에 참여한 곳은 롯데케미칼, 호텔롯데였다.
이를 통해 롯데건설은 지난해 10~11월의 단 2개월만에 롯데계열사들로부터 1조원 가량을 긴급 조달했다.
◆20% 고금리에도 자금조달... '급한 불' 막아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유동성을 진화하기에는 부족했다. 롯데계열사들의 참여로 조달된 금액은 1조원 가량인데 필요한 자금은 3조원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롯데건설은 돈을 조달할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자금을 빌려주는 상대방이 증권사이건, 공제조합이건, 은행이건 가리지 않았다. 이자율이 10%를 넘어도 개의치 않았다.
롯데건설은 KB증권으로부터 단기CP(commercial paper·기업어음) 1000억원을 조달했다. 금리는 무려 12%였고, 만기는 지난해 11월23일이었다. 키움증권으로부터 금리 10%의 단기CP 1000억원도 조달했다. 만기일은 올해 1월 4일이다. 이밖에 하나은행으로부터 단기차입금 1500억원(금리 7.42%. 만기 올해 1월24일), 우리은행으로부터 단기차입금 1500억원(금리 6.66%. 만기 2023년 3월31일)을 조달했다. 부동산 개발사 더시티로부터는 무려 20.90% 고금리에 차입금 380억원을 조달했다.
이들 증권사, 은행으로부터 긴급히 조달한 자금은 2조3500억원대였다. 이 과정에서 롯데물산이 지급보증에 참여했고 롯데건설은 담보를 제공했다. 롯데계열사들로부터 1조원, 외부에서 2조3500억원을 합쳐 약 3조3500억원이 조달되면서 롯데건설은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여전히 살얼음판... 현금성자산 5700억인데 매달 3000억 가량 빠져나가
그렇지만 롯데건설은 여전히 유동성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지난해 12월31일 기준 롯데건설의 현금성자산은 5711억원이다. 전년동기(3455억원) 대비 65.29% 증가했지만 사정을 들여다보면 재무 안정성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우선 단기차입금(유동성장기부채 포함)이 2조8884억원으로 매달 2400억원이 만기 도래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다 롯데건설은 판관비로 매달 650억원 가량을 지출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매달 현금 3000억원 가량이 빠져 나가는데 보유 현금은 앞서 언급한대로 5711억원이다. 유동성 리스크가 아직도 완벽하게 해결됐다고 말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공사 진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매출원가(재료비, 노무비, 경비) 5조원대(월평균 4200억원 가량)는 제외돼 있다.
롯데건설측은 “4월 현재 유동화 시장이 정상화돼 PF관련 상당 부분이 해소된 상태”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롯데건설의 실적이 양호한 터라 유동성 위기를 극복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사태로 롯데그룹이 얻은 상처는 깊다.
롯데케미칼이 롯데건설 지원을 위해 유상증자에 참여하자 어느 주식투자 사이트에는 "롯데케미칼이 (소액) 주주를 돈 빼내는 '빨대'로 보고 있다. 이번 유증(유상증자)은 롯데케미칼 본업과 무관하며 이 정도면 배임(背任)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롯데케미칼은 관종(관심종목) 삭제하겠다"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롯데케미칼의 유증 예정 발행가가 13만인데(14일 현재 18만2900원)인데, 롯데케미칼 주가가 외국인의 강력 매수로 바닥 찍고 불타오르는 것에 찬물을 확 끼얹었다"는 글도 올라와 있다.
◆'재계 5위' 롯데그룹 한때 흔들... 고금리 이자부담↑
롯데그룹은 레고랜드 사태가 아니었다면 서울 서초동 롯데칠성 부지(약 1만3000평)를 3조원 가량에 매각해 자금조달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하면 롯데칠성은 이자율 8%를 받아 이자수입이 생기고 롯데건설도 고금리 이자로 자금 조달할 필요가 없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레고랜드 사태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 2018년 12월 취임해 4년째 장수하며 롯데건설 실적을 개선해온 하석주 대표가 한순간 물러났고 그 자리에는 '40년 롯데맨’ 박현철 부회장이 긴급투입됐다.
피해자는 롯데그룹, 주식시장 참여자들 뿐만이 아니다. 강원도는 앞으로 민간 기업의 자금을 받아 개발사업을 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게 됐다.
롯데건설은 지난해 시공능력평가 8위를 기록한 한국의 대표 건설사로 한국 건설업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아파트 브랜드 '롯데캐슬'을 갖고 있고 국내 최고층 롯데월드타워를 건설했다.
이런 국내 대표 건설사가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선언'으로 존폐 기로에 설 뻔 했고 재계 5위 롯데그룹이 한때 휘청거렸다. 롯데그룹이 흔들렸다는 것은 한국 경제 전체가 한때나마 흔들렸음을 의미한다.
이번 사태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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