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영 지음. 교보문고. 2017년 6월(개정판 초판)
대산(大山) 신용호(1917~2003).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서울 광화문의 교보문고를 설립했고, 통찰력 넘치는 '광화문 글판'의 원작자라는 정도였다. 그리고 보험업에 뛰어들어 돈을 많이 벌었을 것이라고 추정해보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바로 그 광화문 교보문고 매장에 우연히 들렀다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를 읽고서 대산을 다시 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밑바닥에서 출발해 오로지 힘으로 한국 사회의 정점까지 오른 사업가이자 선각자였다.
그의 출발은 믿기 힘들 정도로 소박했다. 그는 가정 사정으로 정규 교육을 아예 받지 못했다.
그는 전남 영암에서 6형제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집안은 궁핍했다. 대산의 아버지는 어릴 때 신동 소리를 들었지만 항일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일제경찰에 요시찰 인물로 분류돼 쫓겨 다녔다. 당연히 집안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집안을 책임진 대산의 어머니 윤씨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배경으로 대산은 보통학교 졸업장조차도 생략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경우 좌절하거나 나쁜 길로 빠지기 십상인데 대산은 달랐다. 그는 스스로 '천일독서'로 명명한 독학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를 극복했다. 목포로 이사와 어머니가 하숙을 하자 하숙생들이 구해준 교과서로 교과 과정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이 책에는 그가 교과서를 탐독하고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나온다.
1933년 16세가 되자 목포상업학교 3학년이던 친구 강일구가 대산을 학교로 데려가 실제로 3학년 시험을 보게 한것이다. 대산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시험을 치렀는데, 선생님은 채점을 하고 나서 "교과목 모두 우수한 성적이고, 이 정도면 우리 학교 학생들과 견주어도 상위권"이라고 평가했다(71 P)
성인이 된 대산은 취직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의 첫 사업은 중국 다롄에서 시작됐다. 지인의 소개로 찾아간 중국 다롄의 후지다 상사에 취업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판매 대리점'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면 큰 성과를 낼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는 이 회사의 후지다 사장에게 이를 제안해 승락받았고, 이를 실제로 사업화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공의 핵심은 '인센티브'였다. 그는 '개인은 보상이 주어지는 일에 가장 헌신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후지다 본사에서 도매상에 판매액의 일정비율을 주듯, 판매 사원 개개인에게 판매액의 일정 비율을 지급하는 제도를 생각해낸 것이다.
1940년 24세가 되자 그는 중국 상하이로 옮겨 곡물 도매업으로 새로 시작해 마찬가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상하이 인근에 작은 창고가 딸린 사무실을 마련하고 회사를 설립하고 회사명을 북일공사(北一公社)로 짓고 중국 전역의 양곡을 중개해 큰 수익을 냈다.
그는 당시 이미 유통업과 사업의 본질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양곡 유통업은 자본금이 많으면 크게 할 수 있고 적으면 적은대로 할 수 있는 사업이다. 자금 회전이 빠른 장점도 있다. 벌어들인 돈을 정체시키지 않고, 바로 물건을 사서 이익을 남겨 팔고 이익을 합쳐 즉시 더 많은 물건을 다시 사서 파는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면 돈을 번다. 이것이 자본금을 늘려가는 빠른 방법이다"(158 P)
"장사를 하려면 쉬지 않고 생각하는 사고력, 왕성한 정보 수집력, 정력적으로 움직이는 행동력, 그리고 결단력이 있어야한다"(159 P)
그렇지만 그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전쟁이 끝나면서 사실상 빈손이 됐다. 재산을 조선에 갖고 가서 쓸 수 있는 돈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금괴로 바꾸려고 했지만 마찬가지로 허사였다. 그렇지만 그는 풍부한 사업 경험이 있었다.
귀국한 그는 몇차례의 시행착오끝에 교육과 보험을 결합한 '교육 보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가난하면서도 열성적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싶어하는 학부모들이 학자금을 쉽게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사업 연결해보자는 구상이었다. 사망, 사고 때 보험금을 지급하는 보험처럼 자녀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가면 학자금을 지급하는 보험을 만든다는 아이디어였다.
1957년 5월 15일 갖은 난관을 이겨내고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 발기인 총회를 열었고 이듬해 1월 27일 재무부 장관의 회사 설립 인가를 받고 정식 사업에 들어갔다. 세계 최초의 교육 보험 사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사업 개시 이후 2년간은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생을 했다는 대목에서는 사업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자존심이 견뎌낼 수 없을 정도의 수모를 겪었다. 월급날까지 급전을 빌리기 위해 사채업자들을 찾아다니며 사정하고 돌어다니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직원들을 똑바로 쳐다보기도 어려웠다"고 회고하고 있다(241 P)
1959년 보험 모집 현상금 제도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사업은 기반을 다지게 된다. 보험 모집인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보험모집현상 이벤트는 1959년 6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본사와 지사의 외근 사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는데 무려 50억환의 실적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업적에 대한 보상은 사람의 의욕을 높여준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회고하고 있다(242 P)
1978년 보유계약액이 1조원을 돌파했고 이듬해에는 1979년에는 2조원을 넘어서는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하면서 지금의 교보생명이 자리잡게 된다.
1981년 6월 그는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지하에 교보문고를 오픈했는데,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금싸라기 땅에 더 좋은 사업장을 오픈하는 주위 권유를 뿌리치고 적자가 날 것을 각오하고 시작한 사업이라고 말하고 있다(272 P).
대산은 교보문고를 열면서 임직원들에게 ▲ 고객이 한 곳에 오래 서서 책을 읽어도 그냥 둘 것 ▲책을 이것저것 보고 사지 않더라도 눈총 주지 말 것 ▲책을 노트에 베끼더라도 그냥 둘 것 ▲책을 훔쳐가더라도 절대 망신 주지 말 것 등 다섯가지 지침을 실천하도록 당부했다고 한다. 이 지침에 나 역시 적지 않은 혜택을 보았음을 고백한다. 지금까지 교보문고에서 공짜로 읽은 책이 세자리수는 족히 될 것이다. 부제 :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창안한 기업가 신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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