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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SK오디세이아
  • 이민주 기자
  • 등록 2024-06-01 15:55:38
  • 수정 2024-06-02 1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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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핏연구소=이민주 기자]

SK오디세이아. 백인호 지음. 도서출판 정음서원. 2023. 4. 5. 





수원에서 중소직물 공장으로 출발한 선경직물이 오늘날 글로벌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과정과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의문과 궁금증을 언론인 관점에서 그리고 긴 역사적 관점에서 실마리를 찾아 그 핵심을 그린 책이다.


저자는 SK그룹 성장사의 밑바탕에 면면히 흐르는 벼리를 2가지로 꼽았다. 하나는 ‘우애와 신임’이라는 후계 구도이며 또 하나는 ‘SKMS’라는 경영철학이다. 최종건 창업 회장이 남긴 ‘우애와 신임’이라는 아름다운 후계 구도는 최종현 선대회장 대에서도 지켜지고 대를 이어가면서 전문경영인과 대주주의 조화를 중시하는 SK 고유의 경영 원칙과 기업 문화를 창조하였다.


최종현 회장은 21세기에 선경이 서구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우위 요소는 서구기업들이 이미 우위 요소를 확보하고 있는 마케팅, 재무, R&D가 아니라 지난 300년 동안 서구의 경제학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 중 하나인 사람의 능력을 활용하는 문제라고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1979년 그동안의 경영이념과 경영기법을 집대성하여 SKMS(SK Management System)를 완성하고 이를 선경의 경영 관리지침으로 확정하였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1989년 최 회장은 SKMS를 통한 그동안의 성과를 평가하고 개념위주의 SKMS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구현하는 방안으로서 SUPEX(Super Excellent)’라는 도구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최태원 회장은 ‘이윤 극대화’를 넘어 ‘행복의 극대화’를 위한

경영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마침내 2005년 SUPEX추구협의회에서 SK의 ‘행복날개’가 탄생했다.


이러한 2가지 핵심 벼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SK그룹의 성장사는 뒤돌아 볼수록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최종건과 박정희의 만남 


선경직물(현 SK그룹) 최종건 회장은 61년 10월 어느 날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추후 5, 6, 7, 8, 9대 대통령)의 수원 공장방문을 받았다. 최 회장은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기계를 손 보는 중이었다. 최 회장은 깜짝 놀랐다. 국가 최고 권력자가 변방에 있는 중소 직물 공장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수원까지는 비포장도로 2차선의 좁은 길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측근 참모(이병희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로부터 수원에 양심적인 전도유망한 기업인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해오던 것을 그날 단행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의미심장하고 상징성이 큰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국운을 바 

꾸는 신호탄을 쏘아올렸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의장은 이해 5월 16일 이른바 5· 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혁명 정부는 혁명의 철학인 6개 조로 된 혁명 공약 제4항에 서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명시했다. 이 공약은 전혀 현실

을 부풀린 것이 아니었다. 실제 끼니를 굶는 가구가 세끼를 정상적으로 먹는 가구보다 많았다. 혁명 공약은 신랄했다. '절망과...' 라는 단어다. 오늘 두 끼 밖에 못 먹는 가구라 해도 내일 처지가 개선될 수있다는 희망이 있으면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당시의 현실은 절망이라

는 단어가 가장 적절했다. 


제2공화국은 데모로 시작해 데모로 하루가 끝나는 데모 천국이었다. 제2공화국 막바지에는 경찰관들의 데모까지 있었다. 일인당 국민 소득은 67달러, 지구상의 최빈국 대열 중 하위였다. 제2공화국은 경제개발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라의 경제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 국민 생활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청사진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박정희 의장이 수원의 선경직물을 방문한 시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박 의장은 혁명을 일으킨 후 겨우 5개월 만에 선경직물을 방문했다. 혁명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권력 기반이 완전히 굳혀지지 않은 시기인 것이다. 박 의장은 기아로부터 국민을 건지는 것이그만큼 시급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 의장이 선경직물을 최초의

방문 기업으로 선택한 것도 주목해 봐야 한다. 박 의장에게 선경 이외 여러 기업들의 정보가 들어왔겠지만 선경직물을 선택한 이유가무엇이었을까. 최종건 창업 회장의 「양심적인 기업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업자의 철학은 중요하다. 창업자가 자신이 세운 기업을 어떤 방법으로 끌고 갈 것인가는 결국 그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양심적인 기업, 높은 수준의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조직은 성공하고 장수한다. 이것은 국내만이 아니라 세계의 기업사(史)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 의장이 선경직물을 선택한 것은 그의 선택안(眼)이 수준 높았고 최종건 창업 회장의 양심적인 기업인 이미지도 때를 만 난 것이다.(최종건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에도 네 번이나 만나는 인 연이 이어졌다. 우리는 앞으로 최종건 창업 회장과 최종현 선대 회장이 그룹의 성장 과정에서 수많은 양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것

이다. 이 책에서는 그때마다 서술해 갈 것이다)


"최 사장(당시 직함)님, 수고가 많습니다. 소문대로 성실한 기업인이시군요."

박 의장은 최 사장의 작업복 차림에 호감이 갔던 것 같다. 박정희의장이 최종건 사장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국사에 바쁘신데 이곳 시골까지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최종건 사장은 대답했다.


"최 사장, 수출輸出)을 연구하십시오. 군사 정부는 앞으로 강력한 수출 전흥 정책을 펼 것입니다. 외화(外貨, 달러)를 벌어들여야 합니다. 수출하려고 하는 기업들에게는 많은 지원이 있을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 방면으로 노력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짧게 끝났지만 이날 대화는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수출 드라이브'라는 폭풍 속으로 밀어 넣은 기폭제였고 '한강의 기적'이라고 세계인이 칭송했던 폭풍 성장을 가져온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최종건 회장이 이날 박정희 의장을 만난 것

은 행운이었다. 수출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선경직물은 섬유 업체 로서는 최초로 홍콩에 메이드인 코리아(Made in Korea) 상표로 직물을 수출하게 되었고 외화를 벌어들이는 첨병 역할을 하게 된 것이 다.



SK의 유공 인수 


걸프는 이미 1980년 3월 원유 공급을 중단했다. 국가 에너지 수급에 적색 신호를 켜 놓은 것이다. 더구나 제2차 오일쇼크로 한국은 한방울의 원유도 아쉬운 상태다. 정부(최규하 정권)는 국영형태의 대한 석유공사 운영 청사진을 내놓았다. 걸프 소유의 대한석유공사 지분

50%를 국영기업체인 석유개발공사(유개공, 油開公)에 매각, 유공 쪽에 맡기는 것으로 기울었다. 최규하 정권의 마지막 동력자원부 유양수陽洙) 장관 등 실무관료도 민간 특정 업체를 선정해 민영화할경우 엄청난 특혜 의혹에 시달릴 것으로 판단, 석유개발공사를 실수

요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역사의 우연성 요소를 만나게 된다. 정국은 신군부의 5.17계엄 확대 조치 이후, 국보위(國保委)가 들어서면서 이 전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끝까지 대한석유공사를 공영기업 형태로 해야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유양수 장관

이 경질되고 박봉환(朴鳳煥) 장관이 임명되었다. 박봉환 장관은 민영화 론자였다. 박 장관은 대한석유공사 민영화 임무를 띠고 부임했다.


이때부터 정부는 대한 석유공사의 민영화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이지만 선경 최종현 회장에게 행운이 깃든 순간이었다.

정부는 민영화의 논리로 누가 원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에 맞추었다. 이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제2 차 석유파동 이후 세계 석유 시장 거래 양상은 석유 유통시장을 지 배해오던 「석유메이저」의 힘이 약화 되고 산유국이 유통시장에 개입

하는 직접 거래로 전개되고 있었다.


산유국은 정부 대 정부의 원유거래 방식은 꺼리고 있었다. 철저한 자국 이익 우선주의였고 석 유 무기화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국제 석유 시장은 민간 상사가 주가 되는 양상으로 변했다. 원유의 거래 형태가 바뀜에 따라 국영 기업의 관료적 형태로는 원유 확보가 어려워졌다. 실제로 정부 대 정부 형태 로 거래를 진행하다가 거래 내용이 공개되어 원유 공급이 단절되는사태가 발생되기도 했다.


정부의 대한석유공사 민영화 방침은 잘된 선택이었다. 정부는 1980년 10월 대한석유공사 민영화 방침을 발표했다. 인수자격 기준 은 다음과 같았다.

①소요) 원유의 장기적, 안정적 확보 능력 ②증설 및 비축사 업을 계획 기간 안에 완공시킬 수 있는 자금 조달 능력 ③산유국에 대한 투자유치능력 ④ 정유회사의 관리능력 ⑤국가기간산업으로서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기업의 성실성 ⑥산유국과의 교섭 능력

과실적재계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의 각축전이 시작된 것이다.


최종현 회장은 손길승, 김항덕으로 꾸민 인수팀을 가동시켰다. 사내 에서조차 극비로 진행되어 이 세 사람 이외에는 눈치조차 챌 수 없었 다. 인수전에는 선경을 비롯하여 삼성, 남방개발, 현대, 효성, 동아건설, 대한항공, 코오롱 등이 뛰어들었고 특히 삼성과 남방개발이 가장적극적이었다. 인수전에 참여한 기업들은 하나같이 강자들이었다.


세간에서는 삼성그룹의 자금력과 조직력으로 보아 삼성의 우세를 점•치기도 했다. 인수전에 참여한 현대그룹(정주영)을 주목할 필요가 있 다. 현대그룹은 추후 극동 정유를 인수해 정유업계(현재의 현대오일뱅크)에 합류하고 유공과 시장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유공(公, 대

한석유공사)을 어느 기업이 인수하느냐에 따라 재계 판도가 바뀌게된다. 대한석유공사는 1979년도 매출액이 1조 1,208억에 달해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매출액 1조 대를 돌파한 유일한 기업이었다. 박봉환 동력자원부 장관은 1980년 11월 28일 드디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할 대상기업을 발표했다. 


선경(최종현)그룹이 대상기업으로 확정되었다. 재계는 경악과 충격에 빠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 다.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기 위해서는 약 9,200만 달러의 자금이 필요한데 선경에게 그만한 자금 동원 능력이 없다는 것이 재계의 지 배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재계의 일방적인 평가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앞장에서 선경화섬이 폴리에스터 필름을 개발, 기술 개 발이 보호되는 4년 동안 공전의 호황을 보아 그때 유공(公)을 인수

할 수 있는 실력(시드머니, Seed money)을 축적하게 되었다는 기억

을 되살려 볼 필요가 있다.


박봉환 장관의 12월 28일 기자회견(조선일보 12월 29일자 보도) 내용은 '정부는 걸프가 팔고 간 대한석유공사 주식의 50%를 주식회사 선경(대표이사 최종현)에 매각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국영기업체인유공을 민영화시켰다. 2차 오일쇼크 이후 산유국들이 유통시장에

적극 개입, 직거래를 하고 있어 국영 기업의 관료적 경영 자세로는 원 유의 안정 공급이 도저히 어려울 것으로 분석했기 때문에 기동성이 있는 민간 기업에 경영을 맡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봉환 장관은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1980년 12월 11일 국가보위 입법 회의에 참석해 민영화 경위를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박 장관은 "유공의 인수에 최종적으로 선경, 삼성, 남방개발 등 3개 업체가 희망해왔으나 원유 도입능력, 오일머니 조달능력 등 종합평가를 통해 인수기업을 선경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라고 보고했다.



선경, 재계 5위로...


대한석유공사 민영화로 재계 판도는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선경 은 1979년 매출액 1,200억 원으로 재계 순위 10위 안팎을 맴돌았으나, 일약 재계 5위로 부상했다. 눈부신 비약이었다.

선경은 유공 인수로 겉으로 드러나는 이익 못지않게 실리도 챙길수 있게 되었다. 관행상 원유거래는 보통 6개월 이상의 외상(유전 스, Usance, 수입어음의 지급 유예)으로 도입하고, 이를 정제해서현금으로 파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원유거래로 인해 선경은

웬만한 금융기관을 소유한 것 못지 않은 원활한 현금 유동성(Cash flow)을 확보하게 되었다. 막대한 원유 수입대금을 6개월간 활용하는 것이다. 최종현 회장은 오랜 숙원이던 수직계열화 구상을 완성하 게 된다. 1973년 '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천명한 이

후 7년 만에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함으로써 '석유'라는 한 축을 거머 쥐게 된 것이다. 수직계열화의 완성은 1991년 울산 컴플렉스의 준공으로 달성되지만, 석유공사를 인수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 다.


최종현 회장의 석유 외교


선경의 대한석유공사의 인수는 10년 적공(積)의 결과였다. 선경은 1973년에 이미 현재의 S-oil 정유공장 위치에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한 바 있다. 수직계열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것이었다. 일본의 이토추, 데이진과 합의하여 성사 직전까지 갔던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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