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년간 반도체는 더 이상 파먹을 게 없다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 반도체가 드디어 가장 큰 먹거리가 됐습니다."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제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이 '실리콘 지능의 시대로'를 주제로 막을 올렸다. 개막일 기조연설에 나선 박승배 뉴욕주립대 빙엄턴 교수의 말처럼, 이날 연사들의 발표는 AI 확산을 뒷받침할 과제가 하드웨어로 옮겨오고 있다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 개막일 기조연설. [사진=더밸류뉴스]
신동주 모빌린트 대표는 현실에서 움직이는 피지컬 AI에 맞춰 연산이 현장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미세공정의 경제성 한계와 첨단 패키징이 맞닥뜨린 발열·대형화 문제를 지적했다. 안현 SK하이닉스 개발총괄 사장은 AI 수요가 늘어나는 속도에 맞춰 메모리 준비 시점을 앞당겨야 한다고 밝혔다.
◆ “AI 화면 밖으로…연산도 현장으로”
신동주 모빌린트 대표가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대전(SEDEX) 2026'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신동주 모빌린트 대표는 '피지컬 AI 시대를 여는 AI 반도체'를 주제로 첫 기조연설에 나섰다. 그는 이미지·음성을 인식하던 AI가 콘텐츠를 생성하는 단계와 복잡한 작업을 스스로 수행하는 에이전트 단계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다음 단계로는 현실에서 행동하는 피지컬 AI를 꼽았다. 생산성과 품질, 안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제조·자동차 등 산업 현장에서 도입이 먼저 본격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신 대표는 피지컬 AI의 연산이 현장 가까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봇이나 자동차는 주변을 인식하고 행동한 뒤 바뀐 환경을 다시 인식하는 과정을 쉼 없이 반복한다. 이 과정을 클라우드를 거쳐 처리하면 실시간 대응이 어렵다는 설명이다. 수십 종의 센서 데이터를 제한된 전력과 공간 안에서 처리해야 하는 만큼 AI 연산에 특화된 NPU의 역할이 커진다고 했다.
그는 피지컬 AI용 반도체가 데이터센터용과 다른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짚었다. 데이터센터 칩은 관리된 환경에서 대량의 요청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데 맞춰져 있다. 반면 현장의 칩은 극저온·고온 환경에서 한 건씩 들어오는 입력을 초저지연으로 처리해야 한다. LLM뿐 아니라 비전·행동 모델 등 다양한 모델을 돌려야 하고, 호스트 CPU에 붙는 가속기가 아닌 단독 시스템온칩(SoC) 형태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신동주 모빌린트 대표가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대전(SEDEX) 2026' 기조연설에서 피지컬 AI가 기존 산업용 기계부터 확산하는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모빌린트의 AI 칩은 최근 누리호 5차 발사 위성에 실려 궤도에서 초기 테스트를 받고 있다. 신 대표는 제조, 메모리, 시스템반도체, AI 모델 역량을 결합하면 한국이 피지컬 AI 시대를 주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AI가 화면 밖으로 나오는 순간 AI 반도체의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며 "피지컬 AI 시대를 대한민국의 시대로 만들자"고 말했다.
◆ "미세공정 한계, 패키징도 벽 앞에"
박승배 교수는 '미래 컴퓨팅 시대의 도전과 기회'를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결론부터 제시하겠다며 AI 시대에 하드웨어가 다시 기술 진보의 중심에 섰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를 기회로 만들려면 먼저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먼저 미세공정의 경제성 한계를 짚었다. 과거에는 집적도를 높일수록 생산단가가 낮아졌지만, 지금은 비용 상승이 집적 효과를 상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업계가 함께 만들던 반도체 기술 로드맵(ITRS)도 7~8년 전 중단됐다. 그럼에도 소비자는 매년 더 나은 제품을 원하고, 그 공백을 여러 칩을 한 패키지에 묶는 첨단 패키징이 채우고 있다는 설명이다.
기술이 나아갈 방향으로는 '상업적 실현 가능성'을 들었다. 그는 결국 돈이 되는 쪽으로 기술이 간다며 휴머노이드, 자율주행, 양자컴퓨팅을 사례로 꼽았다. 미국에서는 이미 자율주행 택시가 도심을 오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양자컴퓨터는 아직 1980년대 메인프레임 수준이지만, 손에 드는 기기 크기로 작아질 날도 멀지 않았다고 내다봤다.
박승배 뉴욕주립대 빙엄턴 교수가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대전(SEDEX) 2026' 기조연설에서 지난 50여년간의 반도체 미세공정 발전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할 하드웨어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이다. 박 교수는 데이터센터 칩의 발열이 공랭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수랭·액침 냉각까지 동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10여년 전 처음 나온 2.5D 패키지는 우표만 했지만, 지금은 10cm를 넘을 만큼 커져 휘어지는 바람에 기판에 붙이기 어렵다고 했다. HBM은 12단까지 쌓지만 GPU 같은 로직 칩 위로는 메모리를 쌓지 못하는데, 열을 빼낼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이제는 하드웨어가 병목이 됐다"며 열 관리, 3D 적층, 통신 속도를 핵심 과제로 꼽았다. 업계가 공동 목표를 세우는 로드맵 활동이 다시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는 "사람은 1년 뒤 일어날 일은 과대평가하고 10년 뒤 일어날 일은 과소평가한다"며 장기적인 시각을 주문했다.
◆ "효율 높일수록 메모리 수요 더 는다"
안현 SK하이닉스 개발총괄 사장은 ‘AI 시대, 메모리 기술의 진화 방향'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AI는 이제 시작”이라고 진단했다. 과거에는 AI 투자를 줄이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면, 이제는 줄이는 것 자체가 리스크라는 인식이 빅테크 사이에 자리 잡았다는 설명이다. 신기술이 대중화되는 데 걸리는 기간도 과거의 100분의 1, 1000분의 1로 줄었다. 그래서 메모리 개발과 표준화, 생산능력 확보를 수요가 형성되기 전에 마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현 SK하이닉스 개발총괄 사장이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대전(SEDEX) 2026' 기조연설에서 차세대 메모리 기술과 글로벌 협력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안 사장은 메모리 수요가 계속 늘어날 근거로 '제본스의 역설'을 들었다. 증기기관의 효율이 높아진 뒤 석탄 소비가 오히려 급증했듯, AI 모델이 효율화될수록 쓰임새가 넓어져 토큰 사용량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람이 아니라 AI 에이전트가 다른 에이전트를 부리는 방식이 확산하면서 사용량 증가 폭이 더 커지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응해 SK하이닉스는 기존 메모리 계층 사이에 새로운 계층을 더하는 구상을 소개했다. 그중 하나가 낸드를 쌓아 만든 HBF다. 안 사장은 낸드가 쓰기 신뢰성과 지연시간에 약하다는 우려에 직접 답했다. AI 추론은 데이터를 쓰기보다 읽는 작업이 압도적으로 많고, 다음에 필요한 데이터를 미리 예측해 불러올 수 있다. 그래서 낸드 기반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안 사장은 1960년대 미국의 유인 달 탐사 계획이 인텔과 미국 반도체 생태계가 성장하는 동력이 됐다고 짚었다. 그는 “AI 확산으로 메모리가 최고 산업인 대한민국에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여러 기업이 각자의 자리에서 개발하고 협업해 새로운 AI 생태계를 만들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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