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지음. 민서출판
- 전헤린은 누구? 1952년 전혜린은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햇다. 서울대 법대 진학은 부친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전혜린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갈 당시 수학 과목은 0점이었다. 과락이 있는 경우 불합격처리되지만 다른 성적이 워낙 출중해 전혜린은 사정위원회를 거쳐 극적으로 구제됐다. 수학을 0점 맞았는데도 전혜린은 전체 2등이었다.
- 전혜린은 21세이던 1955년 독일 유학을 떠났다. 그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을 때 뮌헨 하늘은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회색빛이었다. 전혜린은 학교 근처에 방을 얻었다. 강렬한 인식욕과 날카로운 감수성을 가진 전혜린은 뮌헨대학교에서 그토록 동경하던 문학과 철학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 뮌헨대에는 독일 학생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 터키, 이집트에서 온 유학생도 많았다. 대부분의 학생은 검소했다. 남학생들은 거의 스웨터 바람이고 여자들은 검은 스커트에 검은 양말, 검은 머릿수건, 길게 늘인 생머리가 '제복'이었다. 훗날 전혜린의 저 유명한 검은색 옷과 그들의 그 하늘을 찌를듯한 패기, 오만한 젊은, 순수한 정신, 촌음을 아끼려 노력하는 독일 대학생들을 부러워하며 그들과 경쟁했고,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돼 있는 생활'에 대해 전혜린은 만족했다.
- 전혜린은 독일 유학중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다. 싸구려 번역과 고국에서 보내는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한번은 생활비가 완전 바닥나서 전혜린은 한주일동안 일생 처음으로 완전히 굶었다. 훗날 전혜린은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라고 했다.
- 전혜린은 1959년 독일 유학을 끝내고 귀국해 서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에서 강의를 하고 한편으로는 번역을 햇다. 전혜린이 번역한 헤르만 헤세, 하인히 뵐, 에리히 케스트너, 루이제 린저의 책을 당대의 감수성 예민한 청춘들은 읽고 또 읽었다.
- 죽기 전날, 그녀는 친구, 선배 문인들과 술을 마시던 중간중간에 자꾸 누구에겐가 전화를 해서 화를 냈다. 또 만나고 싶어했다. 그 술자리엔 '무진기행'의 김승옥도 있었다. 그녀는 계속 그러면서도 2차를 가자고, 3차를 가자고 보챈다. 이어지는 시간에 부담을 느낀 다른 이들이 다들 집에 가겠다고...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하고 정말 어쩔 수 없게 됐을 때... 혼자 되는게 두려운 듯 "괜찮아"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서던 그 검은색 정장의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나고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은 그녀가 그 다음날 죽었다는 얘길 들었다.
- 어느 서울대 법대생의 전혜린 회고 : "제가 대학교1학년때 (1963) 전혜린씨 독일어강의를 한학기 들었읍니다. 전혜린씨는 여름에도 까만 마후라에 굽높은 구두를 신고, 한학기 내내 독일어 가르킨다기 보다는 얘기를 많이 해주었지요. 신비로웠고 얘기에 흠뻑 빠졌었어요. 케네디가 암살되었을땐데 "재크린이 재혼한다"하더라구요. 대학교 1학년인 우리들 모두 "절대 안그럴 꺼에요"했는데 전혜린교수가 "너희들은 너무 순진하구나. 재클린은 정열적인 여자다" 라고 했었지요.
- 전혜린은 한때 젊은 세대의 우상이었다.
- 전혜린의 아버지 전봉덕은 친일파 관료였다. 전혜린의 남편 김철수(金哲洙)는 서울대 법대 교수를 역임했고, 개인적으로는 재혼했다. 전혜린의 여동생 전채린씨는 충북대 불문과 교수를 역임했고. 남편 하길종 영화감독은 일찍 사망했다.
- 전혜린. 1934-1965. 경기여고, 서울대 법학과 및 독문학과, 독일 뮌헨대학교 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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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직접 만난 독일 프랑크푸르트는 우중충했다.
- 독일은 변증법의 나라, 레마르크식으로 표현하면 사랑할 때와 헤어질 때가 분명하고 뒤끝이 없다. 여름 방학이 다가오면 이 나라의 대학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온다.
"키는 180센티미터, 금발, 잘 생긴 TH생(공대생)임. 자동차 있음. 이탈리아 여행에 동반자 구함. 아름답고 스포츠를 즐기고 쾌활한 여대생을 구함. 여행비는 각자 부담"
- 1943년 어느 날 뮌헨대학생이었던 한스 숄과 누이 쇼피아 숄은 대담하게도 게슈타포 학생과 게슈타포 교수들로 들끓는 뮌헨대학의 교정에 백장미의 서명이 쓰인 반나치 삐라를 뿌리고 비합리적이고 범죄적인 전쟁을 그만두라고 부르짖었다. 두 자매는 즉결 심판에 회부돼 처형됐다. 그때 뮌헨대 총장이었고 인격자로 이름높았던 후버 교수도 함께 처형됐다. 모든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 독일은 위대한 정신적 전통이 그대로 흘러 내려와 있는 세계의 자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나라이다.
- "Woher Sind Sie?"(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서 나는 도망치고 싶었고, 비전을 쫓고 있었다.
- 바바리를 입거나, 성글고 두터운 털실로 짠 스웨터를 걸치고 머리 수건을 맨 여자들, 회색 하늘, 눈에 안 보이게 가늘게 내리고 있는 촉촉한 비, 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돌이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 어디선가 나는 구운 소시지와 소금에 절인 양배추의 냄새... 이것이 나의 기억에 남아있는 독일 풍경이다.
-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유년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실락원이다.
- 온갖 관료주의적 암기식 교육에 대해서 맹렬한 반발과 자유로운 학문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나는 품고 있었다.
- 우리는 젊었고 행복했다. 먹거나 입는 것보다는 책을 사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을 중시하고 좋아하는 우리의 근본적 공동 요소는 그대로 허용되고 유지됐다. 그 점에서 우리는 언제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가령 수입의 반을 넘는 책 한권을 사기를 우리는 한번도 주저해 본적이 없다.
- 아버지는 나의 보호자이자 지원자였다. 백러시아계의 양복점에서 꼭 소공녀가 입을 것같은 레이스 원피스를 사준 것도 아버지였다.
- 3월 20일은 독일에 거주하는 유명 한국인이자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인 이미륵(본명 이의정, 1898-1951)씨가 죽은날이다
- 백러시아계의 양복점에서 꼭 소공녀가 입을 것같은 레이스 원피스를 사준 것도 아버지였다.
- 물질, 인간, 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 관념, 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그리고 내부에서의 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그러니까 거의 영아기에서부터 내 싹트고 지금까지 나에게 붙어있는 병인 것이다.
- 밤을 지새며 공부를 한 다음날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그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완벽하게 인식에 바쳐진 순간이었다.
-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한다는 것 보다는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만 못 보아도 아편 흡입자들이 느낀다는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라도 들어야 가슴에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 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운 총명,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너의 얼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 서울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앞 학림다방을 나는 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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