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표식품 박규회 -> 박승복 -> 박진선 3대 오너 스토리
박규회 창업주
샘표식품 박규회 창업주(1902 - 1976 사진)는 함경남도 출생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해방직 후인 1946년 일본인 소유였던 서울 충무로의 ‘삼시장유 양조장’을 인수해 샘표식품 설립해 간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학생복 도매업을 하던 그에게 당시 간장을 만드는 일은 도전이었다.
그는 새로운 간장 맛을 내기 위해 일본인이 즐겨먹던 소스를 일일이 맛보며 연구에 돌입했다. 간장을 팔기 위해선 색다른 맛을 찾아야 했다. 간장의 본고장이라고 불리는 일본으로 가 제조기술을 익히려고 했지만 기술을 알려줄리 만무했다. 간장은 습도와 온도의 미세한 차이가 맛을 결정한다. 박규회 창업주는 고군분투해 한국 간장에서 나는 달짝지근한 맛의 비밀을 찾아냈다. 조선 간장과 왜 간장의 차이를 발견한 것이다.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연교차가 작은 해양성 기후이며, 이에 따라 장기간 숙성발효가 불리해 단기간에 발효시킬수 있는 보리나 밀을 콩과 섞어 간장을 만들기 때문에 단맛이 낫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사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간장 판매가 이뤄져야 했다. 샘표식품은 간장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주부를 공략해 국내 최초로 사먹는 간장 시대를 열어 젖히는데 성공했다.
초기에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장맛은 집안맛'이라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간장 맛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알던 당시 고정관념을 바꿔야 했다.
다양한 방법이 시도됐다. 유리병으로 판매되던 간장병을 페트병으로 바꾼 것도 그런 시도의 하나였다. 간장 유리병은 유리 특유의 성질로 잘 깨지고 무거운 병으로 주부들의 손목골절이 잦았다. 샘표식품은 좀 더 가벼우면서도 신선하게 간장을 보관 할 용기를 개발하기로 하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페트병으로 만든 간장 용기를 내놓었다. 이는 커다란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시대 변화도 샘표식품에 우호적이어다.
196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으로 공업화가 강력 추진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는 사람들 늘어나다보니 장독대에서 장을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장독대 놓을 곳이 사라지면 '간장은 시 먹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간장 수요가 증가하자 경쟁이 시작됐다. 샘표간장 외에 닭표, 독수리표,몽고간장을 비롯해 전국에서 1,000여곳의 간장공장이 경쟁을 했다. 리어카로 간장을 싣고 다니며 파격적으로 싸게 판매하는 행상 간장까지 생겨났다. 샘표식품은 이를 이겨내고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박승복 2대 회장
박승복(1922~2016. 사진) 회장은 박규회 창업주의 장남으로 1922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함흥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식산은행(현 한국산업은행 전신)에서 25년간 근무했다. 이후 재무부 기획관리실장, 국무총리 정무비서관 등을 지냈으며, 1973년 초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을 역임했다.
초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을 역임하며 주민등록번호 제도 도입, 소양강댐 준공, 세종문화회관 설립 등을 추진했다. 원리원칙을 지키는 소신파로, 중재와 갈등 조정력이 빼어난 행정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샘표 경영은 공직생활을 끝낸 55세의 늦은 나이에 참여했다.
부친 박규회가 서울 명동 대연각호텔 맞은편에서 학생복 도매업을 하다가 1945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간장 공장을 인수해 샘표식품을 창업한 것이 계기가 됐다. 샘표의 전신은 1916년 설립된 가족회사인 삼시장유 양조장으로 8, 15 해방으로 일본인이 물러가자 조선인 근로자 20여명이 겨우 가동하고 있었다.부친 박규희가 자신의 학생복 도매업 자금만으로 삼시장유 양조장 인수를 버거워하자 박승복 회장은 식산은행 퇴직금 등으로 밑천을 마련해 샘표식품 인수에 참여했다. 그래서 박승복 회장은 창업 2세이지만 공동 창업자로 불리다.
박승복 회장은 식품업 본연의 가치인 품질 관리에 철저했다. 1987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인 간장 공장을 지었다. 그는 2009년 펴낸 회고록(장수경영의 지혜)에서 "원칙을 지키니 두려울 것이 없고, 건강하니 어떤 것도 거칠 것이 없다"는 소신을 밝혔다.
박승복 회장은 평소 직원들과 격 없이 지냈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매일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식사했다. 노조 설립을 먼저 권유했을 정도다. 노사간 신뢰가 쌓이면서 샘표는 지금까지 단 한차례의 노사분규가 없었다.
기업 총수답지 않은 검소함도 유명하다. 달력 뒷면과 이면지를 활용해 메모지로 이용했다. 박승복 회장은 자신이 타던 10년 된 자동차를 장남인 박진선 사장에게 물려줘 40만㎞를 타고서야 바꿨다는 일화도 있다.
박승복 회장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은 것이 식초다. 하루 세 번 식초를 마셔 ‘식초전도사’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흑초음료 '백년동안'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박 회장이 국내에 식초붐을 일으킨 계기는 2005년 10월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찬강연에서 '투명 경영'을 주제로 80분동안 강연을 하던 자리였다. 박 회장은 80분 내내 경영 이야기를 하면 자칫 지루할 것 같아 후반에 식초 이야기를 덧붙였는데, 오히려 박 회장의 식초 이야기가 청중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이 행사는 경영학 강연회가 아니라 식초 강연회가 됐다. 이후 방송과 언론에서 식초의 효능을 집중 조명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내 나이가 84세이지만 48라는 기분을 살고 있다. 술도 잘 마시고 아무리 바빠도 피곤을 느끼지 않고 검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비결은 식초"라고 말했다.
▶박승복 회장 프로필
1922년 함경남도 함주 출생 / 1940년 함흥공립상업학교 졸업 / 1940년- 1964년 한국식산은행(현 한국산업은행 전신) 근무 / 1965년 재무부 기획관리실장 / 966년-1972년 국무총리 정무비서관 등 / 1973년- 1976년 초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 1976년- 2016년 샘표식품 대표이사 사장, 회장 / 1994년- 2016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 1992년 대한적십자사 서울특별시지사 회장 / 1993년- 2014년 국총회 (국무총리실 출신 동우회) 회장 / 1993년- 2014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이사, 부회장 / 1996년-2014년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장 / 1998년-2001년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 /1999년-2009년 한국식품공업협회 회장 / 2003년-2014년 한국회계기준원 총회 의장
박진선 3대 오너
샘표식품은 미국에서 전자공학과 철학을 공부한 장남 박진선(아래 사진 오른쪽. 왼쪽은 부친 박승복) 사장의 3대 경영기를 맞았다. 박 사장은 선친으로부터 학습 받고 물려받은 가업정신, 본분과 분수를 고스란히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샘표식품은 '샘표 우리맛 발효학교' 를 진행한 데 이어 2016년에는 '우리맛 연구' 를 본격화 하기 위해 셰프, 영양학자, 연구원 등으로 구성된 '우리맛연구팀' 이라는 팀을 새롭게 꾸리기도 했다.
박진선 대표는 철학박사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 석사를 받은 뒤 전공을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철학으로 바꿔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하지만 부친의 권유로 가업을 이어 받기로 결심했다.
귀국해 회사를 맡았을 당시 위기감에 빠졌다고 한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니 ‘자칫 회사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는 경영 환경이 급변하던 때였어요. 대형마트라는 새로운 유통 채널이 생기고 경쟁사에서 신제품을 속속 내놓던 때죠. 이때까지도 회사는 공장만 하나 덩그러니 있는 양조장 수준이었어요. 취임하자마자 영업·마케팅 조직을 새로 만들고 품질관리 인력을 늘려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교수하는 것보다 간장회사 사장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진선 대표 프로필
▷1950년 서울 출생 ▷1973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79년 스탠퍼드대 전자공학석사 ▷1988년 오하이오주립대 철학 박사 ▷1997년 샘표식품 대표이사 ▷2008년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2011년 국제한식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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